관음토, 흙을 먹으면 잠시 공복감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관음토(흙을 먹어 허기를 달래려고 함)와 식인(Cannibalism)
굶주림이 일상화되면서 기민(饑民)들의 먹거리는 점차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영역으로 추락했습니다. 1928년 초기, 비축된 곡물이 바닥나자 사람들은 잡초, 나무껍질, 들나물, 그리고 곡물의 껍질(겨)로 연명했습니다.
산시성과 쑤이위안 일대의 들판에는 뜯어먹을 푸른 풀잎 하나 남아있지 않았고, 이후에는 말이나 소의 배설물에 섞인 소화되지 않은 곡물 알갱이, 심지어 가죽 신발의 밑창이나 짐승의 뼈까지 삶아 먹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농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진흙, 이른바 관음토(觀音土, Guanyin mud 혹은 고령토)였습니다. 관음토를 섭취하면 일시적으로 위장이 부풀어 올라 끔찍한 공복감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이 흙은 인체에서 전혀 소화되거나 흡수되지 않았습니다.
포만감이 사라지면 기민들은 살기 위해 다시 흙을 삼켰고, 결국 위장과 장관이 무거운 흙으로 꽉 막힌 채 배변조차 하지 못하고 배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올라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사망했습니다. 산시성의 바오지(Baoji) 현지와 치산(Qishan) 일대 지방지에는 "물가가 폭등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人曾相食)"는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살육뿐만 아니라, 거리에 버려진 수많은 시신들 중 손과 발이 온전한 시신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생존자들은 자신이 자식이나 부모의 시신을 먹지 않으면 어차피 다른 누군가가 훼손하여 먹을 것이라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인육을 취했습니다.
여름이 다가오면서 거리 곳곳에 방치된 시신들이 부패하기 시작하자, 정부 기관이나 남아있던 지역 유지들은 전염병을 막기 위해 바오지현과 푸펑현 등지의 성문 밖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고 수만 구의 시신을 한꺼번에 쓸어 넣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명 높은 만인갱(万人坑)입니다.
대규모 난민 이동과 전염병의 창궐
생존의 기로에 선 청장년층은 난민이 되어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산시성에서만 약 40만 명이 외부로 탈출했고, 20만 명이 넘는 부녀자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허난성, 산시성, 베이징, 톈진 등지로 헐값에 인신매매되었습니다. 빈집과 텅 빈 마을은 식량을 찾아 헤매는 도적 떼들의 차지가 되어 약탈과 방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피난을 떠난 곳에의 생활도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간쑤성 징위안 지역의 이재민 수만 명은 장가점이라는 특정 지역에 극도로 밀집하게 되었습니다. 영양실조로 극도로 쇠약해진 이재민 집단 내에서 콜레라, 발진티푸스 등 수인성 전염병과 열병이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최소 수천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했습니다.
국제슬롯의 1920-1921년 구호 성공과 1928-1930년 구호 실패
1920-1921년 화북 지역에서 발생했던 대기근 당시,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 월스트리트 은행가 토머스 라몬트 주도로 적십자사(ARC)와 서구 종교 기구들이 적극 개입했습니다. 중국 내에서도 14개 이상의 토착 자선 단체들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광범위한 구호 네트워크를 형성했습니다. 이때 형성된 기구가 바로 화양의진회(CIFRC)였습니다.
1928년 가뭄이 닥쳤을 때도 CIFRC를 위시한 기구들은 재난 현장에서 분투했습니다. 1929년에만 38만 2천 달러를 간쑤성에서 장쑤성에 이르는 지역에 배분했으며, 1930년에도 간쑤와 산시성에 수만 달러의 현금을 투입해 난민들에게 기본 숙소를 제공하고 무료 급식소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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