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또다시 어딘가의 문 앞에서

by류정uk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몇 번이나 다시 태어났는지 세어보려 했다. 여섯 번쯤이라고 적었다가, 결국 그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지금 나는 Broadbottom 44번지*의 부엌에 앉아 이 마지막 페이지를 쓰고 있다. 글레나가 약속대로 꺼뜨리지 않은 불 아래서.


창밖으로 익숙한 영국의 하늘이 보이고, 주전자에서는 물이 끓고 있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조금 있으면 누군가 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일 수도 있고, 처음 보는 얼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딸에게서 문자가 올 것이다.


문 밖에 서 있던 열 살의 깜불이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자기가 그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 될 줄은.


서른다섯의 나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른 토스트 두 조각 앞에서 눈물 콧물 다 쏟던 그 여자가, 언젠가 이 나라의 한 골목에 자기 이름으로 문을 열어두고, 자기 발로 걸어 들어온 딸과 함께 짐을 나눠지며 늙어갈 줄은.


쉰의 나도 알 리 없었다. 루턴에서 낮에도 불을 끄지 못했던 그 방이, 몇 해 뒤 이 44번지 문 위에서 다시 켜질 줄은. 그리고 그 불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시간의 생명줄이 될 줄은.


돌아보면 이 바카라에 쓴 모든 순간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


답은 한 번에 오지 않았다.



밀양 집의 문도 계절을 바꿔가며 열리고 닫혔다. 배낭여행자, 짐을 짊어진 타국의 젊은이, 그저 잠시 쉬어갈 곳이 필요했던 동네 이웃. 가끔은 '지나가다가' 들렀다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지나가다 들른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말하지 않은 사정을 품고 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걸 캐묻지 않았다. 일단 밥부터 먹었다.


내가 건넨 것에 그럴듯한 조언은 없었다. 따뜻한 밥 한 끼, 밤늦도록 이어지는 이야기, 미리 데워둔 주전자에서 따라낸 차 한 잔. 가진 거라곤 오래된 찻주전자와 남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지 않을 인내심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그런 것들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텅 빈 집에 들어와 불을 켜준 사람. 법정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해 준 작은 손길들. 오십 년 만에 나타나 “밥은 뭇나” 하고 먼저 물어준 학이오빠. 그리고 밀양의 식탁을 스쳐 간 수많은 인연들.


혼자 뚜벅뚜벅 걸어온 줄 알았다. 몇십 년을 '나 혼자 잘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누군가가 켜두었던 불빛을 따라 걸어온 셈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계속 손전등을 비춰주고 있었다니. 이제 와서 조금 민망하다.


그중에는 오래 걸려서야 겨우 마음으로 부를 수 있게 된 이름도 있다.


큰딸.


요즘 우리는 가끔 부엌 식탁에 마주 앉는다. 계약서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메뉴 이야기로 넘어가고, 별표 하나 때문에 티격태격하다가도(대개는 내가 진다) 결국 밥을 먹는다.


아직 완벽하게 풀린 것은 아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만 이제는 한 사람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는 대신, 둘 다 다음 날 아침 부엌으로 나온다.

그 정도면 됐다.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도 여전히 있다. 다만 우울이라는 놈과는 이제 서로 안면을 튼 사이다. 반갑진 않아도 놀라지는 않는다.


“왔어? 차는 알아서 타 마셔.”


그래 놓고 결국 물은 내가 올린다.

인생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지 않고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아팠고, 웃겼고, 홀가분했다.


넘어진 날에는, 일단 물부터 올리면 된다.

괜찮아요. 토스트는 내일 먹어도 돼요.


주전자에서는 오늘도 물이 끓는다. 나는 찻잔을 하나 더 꺼내 놓는다.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 44번지가 자리한 Broadbottom은 지금은 천 명 남짓 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입니다. 1850년 무렵 방적 공장 전성기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만 1,200명, 선술집이 일곱 곳, 가게가 서른세 곳이었지만, 지금은 선술집 하나와 중국집 테이크아웃, 미장원, 가든센터만 남았습니다. 그


시끌벅적했을 산업 유적지는 이제 야외 역사관으로 조용히 보존되고 있고, 옛 역 화물창고는 아래층은 승마 센터, 위층은 볼링장이 되었습니다.


마가렛이 매주 수요일 앉아 있던 시계 아래 자리에도, 이 마을의 오랜 시간이 조용히 머물러 있습니다.





이전 23화읽어주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