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영국.한국.뉴질랜드를 거쳐 다시 영국으로
큰딸 유진이는 두 살 때부터 친정 부모님 손에서 자랐다. 내가 중동으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는 동안 그 아이는 밀양의 마루에서 컸다. "엄마 어디 가노." 하고 묻던 네 살배기가, 열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곁으로 왔다. 낯선 나라, 낯선 언어, 그리고 십 년 가까이 떨어져 지낸 엄마. 그 모든 것을 열세 살짜리 아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때 나는 미안한 마음만큼 아이를 살뜰히 챙기지는 못했다. 영국에서 새로운 삶을 짓느라 바빴다.
그 뒤로 유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한국과 뉴질랜드를 오갔고, 영국에도 몇 번씩 왔지만 정착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올해 다시 영국에 오겠다고 했을 때도 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많이 지쳐 있었다. 한때 스무 채까지 늘렸던 집이 네 채 줄어 열여섯 채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따로 세를 놓는 차고와 창고, 하숙생까지 있었다. 전부 합치면 내가 매달 챙겨야 하는 세입자가 25명이었다.
자랑이 아니라 할 일 목록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딸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러다 시험 삼아 스프레드시트 하나를 맡겨봤다. 열여섯 채와 창고 일곱 개, 하숙생까지 합쳐 스물다섯 명분의 임대료 입금 현황을 정리해달라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결과물이 왔다. 색깔별로 구분되고, 항목마다 정렬되고, 요약 표까지 맨 위에 얹혀 있었다. 나는 그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이십 년 동안 나는 낡은 공바카라에 세입자 이름과 금액을 손으로 적어왔다. 밀린 사람은 별표, 두 달 밀리면 별표 두 개. 나만 알아보는 암호였다. 딸은 그걸 보더니 대뜸 물었다.
"엄마, 이 별표는 뭐야?"
"밀렸다는 뜻이지."
"별 하나가 얼만데?"
"몰라, 그냥 느낌으로 알아."
딸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자기 엄마가 이 십여 년째 주먹구구식 암호로 백만 파운드짜리 자산을 운영해온 사람이라는 걸 그제야 실감한 표정이었다.
처음 며칠은 신기했다. 딸의 대학 전공이 비즈니스 어드미니스트레이션이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새삼 떠올렸다. 런던에서 그 공부를 할 때는 그저 뭔가 실용적인 걸 배우는구나 싶었는데, 그게 훗날 내 별표 암호를 갈아엎을 무기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신기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제는 딸이 정리만 하고 끝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정리를 하다 말고 꼭 한마디를 얹었다.
“엄마, 이 세입자 계약서 왜 이렇게 허술해? 보증금 조항이 없잖아."
"이십 년 동안 이렇게 해도 문제없었어."
"문제없었던 게 아니라 엄마가 운이 좋았던 거지."
그 말에 나는 순간 속이 뜨끔했다. 뜨끔한 걸 인정하기 싫어서 목소리가 커졌다.
"내가 이 집들을 어떻게 사고 어떻게 지켰는지 알아? 무단점유자 내쫓을 때 니가 있었어? 법정에서 이 년을 버틸 때 니가 옆에 있었냐고."
말이 나온 순간 후회했다. 그건 그날의 스프레드시트와 아무 상관 없는 말이었다. 오래전, 열세 살짜리를 영국으로 데려와 놓고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그 시절,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전, 어린 딸을 두고 중동으로 떠나야 했던 그 겨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말이었다. 딸도 그걸 알아챘다. 얼굴이 굳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다 혼자 했으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거야?"
부엌이 조용해졌다. 노트북 화면에는 여전히 색깔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표가 떠 있었고, 그 정직한 초록색과 빨간색 셀들이 갑자기 남처럼 낯설어 보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프레드시트고 뭐고 그냥 내 별표대로 살 걸 그랬다고.
다음 날 아침, 부엌에 먼저 나와 있던 건 딸이었다. 식탁 위에는 어제 그 표가 다시 열려 있었다. 딸이 고개도 안 들고 말했다.
"어제 그거, 좀 심했어. 근데 나도 좀 심했어."
나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물 끓는 소리가 방 안을 채우는 동안, 딸은 계약서 항목을 하나씩 짚으며 말없이 고쳐나갔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커피를 저었다. 사과라는 게 꼭 말로 와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종종 부딪혔다. 딸은 내 방식이 구식이라 했고, 나는 딸의 방식이 차갑다고 했다. 어떤 날은 별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열세 살 그해 여름까지 갔다가, 결국 둘 다 지쳐서 그냥 밥이나 먹자로 끝났다. 완전히 풀렸다고는 못 하겠다. 어떤 앙금은 스프레드시트로도 정리가 안 됐다.
그래도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이제는 부딪히고 나서도 다음 날 아침 부엌에 둘 다 나와 있다는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그 길로 며칠씩 서로 연락을 끊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이십몇 년 전과 지금의 유일한 차이일지도 모른다. 화해가 아니라, 그냥 도망가지 않는 것.
짐이 가벼워졌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서류 더미는 줄었지만, 마음의 짐은 오히려 새로 몇 개 늘었다. 다만 이제는 그 짐을 혼자 지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대신, 부엌 식탁에 널어놓고 딸과 나눠 보는 정도는 하게 되었다.
44번지에서 J와 앨리슨에게 내주었던 창가 자리. 나는 그 자리를 낯선 이들에게는 그렇게 쉽게 내어주면서, 정작 내 딸에게는 오래도록 내어주지 못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옆에서 장단을 맞춰주는 사람이 있다. 정확히는, 내 장단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어제도 딸이 말했다.
"엄마, 그 박자 아니야."
나는 대답 대신 북채를 좀 더 세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