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내가 없어도 열린다

-2024년 봄, 밀양

by류정uk

피터와 수가 밀양 집에 머물고 싶다고 연락해 온 건 내가 영국에 있을 때였다.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원주민 교육에 바친 부부였다. 나는 주저 없이 “예스!”라고 했다. 대답부터 해놓고 방법은 나중에 생각하는 것. 임대업 20년이 남긴 몇 안 되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학이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름을 영어로 풀 줄 몰라 두 사람에게는 '미스터 김'이라고 소개했다. '헬로'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지구 반대편에서 온 노부부를 하루 종일 맡게 된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 일정을 문자로 읊었다.

“점심은 근처 뷔페로 모실 거예요.”

“그다음엔 만어사로요.”

답은 매번 엄지척 하나였다. 오빠의 답장 어휘는 그걸로 완결되어 있었다. 현장 사정은 하나도 모르면서, 나는 콜센터 직원처럼 일정만 읊고 있었다.


뷔페에서 오빠는 번역기에 대고 “이거 무야(먹어봐), 이거!”를 되풀이했다. 번역기도 경상도 사투리와는 초면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오빠는 화면을 포기하고, 묻지도 않고 자기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두 사람 접시에 턱턱 얹었다.

접시는 금세 산처럼 쌓였다. 그날 두 사람이 만어사 돌너덜보다 먼저 본 돌무더기였다. 그날 피터가 처음 배운 한국어는 “안녕하세요”도 “감사합니다”도 아닌 “이거 무야”였다고 한다. 표준어보다 사투리를 먼저 익힌 영국인이, 아마 그날 밀양에 한 명 생겼다.


그날 밤 사진이 도착했다. 절 마당 위로 구부러진 노송, 산등성이를 뒤덮은 돌너덜. 그리고 모자 쓴 오빠와 피터 사이로 선글라스를 낀 수가 얼굴을 들이밀며 활짝 웃고 있는 셀카. 오빠 표정을 보니 무용담 목록에 한 줄이 추가된 게 분명했다. 사진에 없는 장면은 며칠 뒤 수의 메시지로 알았다.

돌너덜을 걷는 내내 오빠는 한 번도 앞서 걷지 않았다고 한다. 늘 수의 한 걸음 뒤에서, 손을 반쯤 내민 채로.

수가 흔들리는 돌을 밟을 때마다 그 손이 먼저 움찔했다고. 나는 그 대목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자세를 나는 알았다. 오십 년 전, 비탈길을 내려오며 한 손을 뒤로 돌려 지게 위의 나를 받치던 바로 그 자세였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오빠는 평생 해온 방식으로 말한 것이다.


넘어지지 마라. 내가 뒤에 있다.


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평생 남의 마을에서 낯선 사람으로 살았어요.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사람이 우리를 맡아준다는 게 어떤 뜻인지, 우리는 알아요.”


저녁은 부산에서 한 시간을 달려온 동생 부부가 이어받았다. 두 사람에게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살폈다. 오빠는 그제야 임무를 마쳤다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후기에는 '좋은 운전사 미스터 김'과 함께 길고 근사한 하루를 보냈으며, 내가 체류를 세심하게 조율해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내가 조율한 것이라곤 문자 몇 줄과 엄지척 몇 개였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차를 몰았고, 누군가는 밥을 먹였고. 누군가는 돌밭 위에서 손을 내밀었다.


문을 연다는 게 꼭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없어도, 문은 내 사람들의 손으로 열렸다.

밤늦게 오빠에게 답장이 왔다.

“뭘. 잘 놀았다.”

지게 위에 얹어주던 진달래꽃처럼, 무심하고도 다정한 다섯 글자였다.

나는 그 문장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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