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후 네 시가 넘으면 현장 공기가 달라진다. 발걸음이 가볍다. 장갑 벗는 손이 빨라지고, 작업복 지퍼 내리는 소리가 라인 끝에서부터 번져 온다. 나도 이 분위기가 싫지 않다. 한 주를 무사히 버텼다는 안도감이니까. 그동안 나는 정문 안쪽의 위험을 열심히 봤다. 안전커버가 닫혀 있는지, 점검표에 서명이 있는지, 지게차 동선에 사람이 서 있지는 않은지. 정문을 나서면 내 몫이 끝난다고 은연중에 생각해 온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그런 구석이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 하면 한 번쯤 듣게 되는 소식이 있다. 현장에서는 아무 일 없던 사람이 퇴근길에 다쳤다는 연락이다. 안전화에 안전모까지 갖추고 하루를 버틴 사람이 정작 집으로 가는 길 위에서 다친다. 그 차이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보면 현장에는 장치가 많다. 안전화와 안전모, 작업표준서, 옆 라인 동료의 눈, 반장의 한마디. 길에는 그게 하나도 없다. 대신 이런 속말이 있다. "에이, 매일 다니는 길인데 뭐." "오늘따라 피곤하네, 빨리 가서 눕자." 하루 종일 긴장했던 몸은 정문을 지나는 순간 스위치가 꺼지듯 풀린다. 교대 근무를 마친 사람이라면 졸음까지 얹힌다. 금요일이면 주말 계획에 마음이 먼저 집에 가 있다. 피로와 들뜸과 익숙함이 한꺼번에 겹치는 시간이 하필 퇴근길이다.
한 가지 더 눈에 밟히는 게 있다. 사고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대개 사고가 난 장소만 본다. 공장에서 났으면 공장을 이야기하고, 도로에서 났으면 도로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람은 하루 종일 한 몸으로 움직인다. 새벽에 일어난 피로도, 라인에서 쓴 체력도 같은 몸에 쌓인다. 현장에서 쓴 만큼의 체력이 퇴근길에 청구서처럼 날아드는 셈이다.
퇴근 시간 주차장에 서 본 적이 있다면 알 거다. 시동을 걸면서 휴대폰부터 보는 사람, 안전벨트를 정문을 나선 뒤에야 매는 사람, 라이트도 켜지 않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사람. 다들 나쁜 뜻은 없다.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을 뿐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제도도 이 문제를 비켜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2018년부터 회사가 관리하지 않는 통상적인 경로의 출퇴근 사고도 산재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법이 퇴근길을 일의 연장선으로 본다는 뜻이다. 물론 보상이 늘었다고 사고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슬롯가 "집에 가는 길까지가 노동의 하루"라고 인정했다는 사실은 작지 않다. 나는 이 변화를 보면서 정문 앞에 그어 두었던 내 선이 좀 민망해졌다. (안전 담당자가 정문에서 퇴근해 버린 셈이니, 나도 처음엔 꽤 머쓱했다.)
그러면 회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솔직히 정문 밖은 우리 소관이 아니다. 길을 고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졸음을 대신 깨워 줄 수도 없다. 그래도 정문 안에서 마지막으로 건네는 말 한마디는 우리 몫이다.
거창한 걸 하자는 건 아니다. 요즘 해 볼까 생각하는 건 아주 사소한 일이다. 금요일 마지막 작업 전 대화에서 "오늘은 몇 시쯤 집에 도착해요?" 하고 한 번 묻는 것. 안전 수칙을 읊는 대신 집에 가는 얘기를 하는 거다. 사람은 목적지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 길을 조금 더 또렷하게 그린다. 그러면 운전대를 잡기 전에 한 번쯤 숨을 고르게 된다. 효과가 있을지는 해 봐야 안다. 안 통하더라도 밑질 건 없다. 어차피 말 한마디 하는 데 드는 건 30초 남짓이니까.
나는 퇴근길 끝에 현관문이 열리면 아내와 딸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 현장 사람들도 저마다 그런 현관을 하나씩 갖고 있을 거다. 아이 목소리가 들리는 집이든, 혼자 켜는 불빛이든, 누군가 늦는다고 걱정하는 전화 한 통이든.
그 현관문이 열려야 하루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