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가는 것 보다 방향이 중요하다
최근 웨이파인딩(Wayfinding) 사이니지 개선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길을 잃을까.
처음에는 단순히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내판이 부족하거나 표기가 복잡해서 길을 찾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장을 다니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길을 잃는 이유는 방향감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디자인에서는 이를 웨이파인딩이라고 부른다.
목적지까지 쉽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체계다.
좋은 웨이파인딩은 사람들에게 길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길을 찾을 수 있게 만든다.
공항에서도, 지하철역에서도,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안내판을 보기 위해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불안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공간에서만 길을 잃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도 길을 잃고,
사업에서도 길을 잃고,
관계에서도 길을 잃는다.
그리고 때로는 인생에서도 길을 잃는다.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의외로 공통점이 있다.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선택지가 너무 많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보다 어떤 길이 나에게 맞는 길인지 알 수 없어서 방황하는 경우가 더 많다.
AI 시대는 그런 의미에서 흥미롭다.
예전에는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도서관을 찾아가야 했고,
전문가를 만나야 했으며,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몇 초 만에 수많은 정보와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자주 길을 잃는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방향이 부족해서다.
AI는 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결국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시민공감디자인단 활동을 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주민들과 현장을 걸어보면 전문가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쉽게 발견할 때가 많다.
길 찾기가 어려운 공간,
이용하기 불편한 시설,
불안감을 주는 골목길.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은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길을 몰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다.
확신이 없어서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좋은 디자인은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는 일에 가깝다.
"이 길이 맞습니다."
그 한마디를 공간이 대신 전해주는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브랜드를 컨설팅하다 보면 많은 기업들이 성장의 답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답보다 방향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방향이 명확한 브랜드는 디자인도 명확해진다.
메시지가 분명해지고,
고객이 이해하기 쉬워지고,
조직의 움직임도 하나로 모인다.
반대로 방향이 흔들리면 아무리 좋은 디자인도 힘을 잃는다.
결국 디자인은 길을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공간의 길을 만들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길을 만들고,
기업이 나아갈 길을 만들고,
때로는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길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수없이 길을 잃으며 여기까지 왔다.
디자인을 공부하고,
현장을 다니고,
학생들을 만나고,
시민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정답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왔다.
그것은 방향이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것만은 대신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왜 그 길을 가려 하는가.
그리고 그 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가.
결국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디자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디자인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현장을 걷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진다.
좋은 디자인은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