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아이들은 감정쓰레기통이 되었나
지난주 어느 날, 또래를 폭행한 14살 아이들의 영상을 봤습니다.
화가 났어요.
"이건 좀 너무한데" 싶었습니다.
며칠 뒤, SNS 중독에 빠진 14살 아이들 기사를 봤을 때는
마음이 또 달라지더라고요.
안타까웠고, 부모와 어른이 어떻게든 막아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그리고는 그들이 같은 14살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이번 레터는 그 작은 깨달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청소년 정바카라에 대한 글로 쓰려고 했거든요.
처벌 연령은 낮추면서, SNS 연령은 올리자니?
이건 모순이 아닌가?
그래서 두 정바카라의 모순을 짚는 결론으로요.
그런데 쓰면 쓸수록 글이 어색해졌습니다.
분석문 톤이 됐고,
결론이 너무 깔끔했어요.
"정바카라의 일관성이 필요하다"라는 식의 마무리가 어쩐지 거짓말 같았습니다.
정치인들이 하나마나하는 소리를 하는 듯한 느낌.
며칠 동안 글이 안 풀렸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을 살짝 돌려봤습니다.
청소년 쪽이 아니라, 그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 쪽으로요.
분노할 때는 어른 취급하고, 두려울 때는 아이 취급한다는 것.
그 분류가 청소년의 실제 상태와 거의 무관하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편리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청소년을 두 가지 모양으로 빚고 있었던 거예요.
이 문장에 도달했을 때, 저 자신이 가장 먼저 찔렸습니다.
이 글이 청소년에 대한 글이 아니라,
저 자신을 포함한 어른들에 대한 글이었어요.
분노가 향할 곳이 필요해서
14살을 어른으로 끌어올리고,
보호 본능을 행사하고 싶어서
14살을 아이로 끌어내리는...
그 두 동작을 저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
글쓴이가 그 모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인정하지 않으면,
이 글은 또 하나의 도덕 강론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런 문구를 찾았어요.
나는 언제나 만개한 꽃보다는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를
소유보다는 욕망을,
분별 있는 연령보다는 청소년 시절을 사랑한다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 (André Gide)가 남긴 글이라고 합니다.
청소년기는 모호해야만 의미가 있다는 결론.
어른이면서 아이이기도 하고,
잘 알지만 동시에 모르고,
순수하지만 때로는 순수하게 악하기도 한,
그런 모호한 상태.
그 모호함을 무언가로 선을 그어서 정의 내리고 싶은 건
어른들의 욕심이겠죠.
아마 글을 읽으시면서, 어느 순간 잠깐 멈추는 지점이 있을 거예요.
그 멈춤 있었다면 이번 레터가 잘 발행되었다는 뜻일 것 같네요.
https://eigenknot.com/youth-suffer-double-bind-knot-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