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보다 손가락이 기억하는 단축키
바카라 작업을 하다 보면 자주 쓰게 되는 단축키가 있다.
Alt + 0133 = …
Alt + 0183 = ·
Alt + 0149 = •
처음에는 숫자를 하나씩 외웠을 것이다. 이제는 굳이 생각하지 않는다. 말줄임표가 필요하면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이고, 가운뎃점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다.
Ctrl+C, Ctrl+V 정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복사하고 붙이고, 잘못했으면 Ctrl+Z를 누른다.
컴퓨터 앞에서는 실수가 그리 무섭지 않다.
잘못 지운 문장도 돌아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작업도 이전 단계로 되돌릴 수 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내 인생에도 Ctrl+Z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학생 때로 돌아간다면 지금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왜 공부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시험이 끝나면 잊어버릴 것을 왜 외워야 하는지, 어른들이 왜 그렇게 공부하라고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는 시험지를 잘 풀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나중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조금이라도 넓혀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바카라을 조금 더 읽고, 귀찮다는 이유로 미뤘던 것들도 조금 덜 미룰 것 같다.
온라인 게임생활은 조금 다르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 덜 흔들릴 수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일이 어려운 것보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더 어려울 때가 많았다. 언제 나서야 하는지, 언제 물러서야 하는지, 무엇을 참아야 하고 무엇은 말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은 정답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예전보다는 조금 안다.
모든 말에 반응할 필요는 없다는 것.
참는다고 모든 일이 지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은 후회도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스물네 살의 나에게 지금의 경험을 그대로 가져다줄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온라인 게임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내가 그때보다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결국 그 시간을 이미 지나왔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아 아쉬웠던 시간도 있었고, 온라인 게임에서 잘못 판단했던 일도 있었다. 괜한 말을 해서 후회한 날도 있었고, 반대로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오래 마음에 남은 날도 있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판단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로 돌아가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은 어쩌면 과거에 잘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만들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Ctrl+Z를 누르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실수를 지워버리면 그 실수에서 배운 것도 함께 사라질 테니까.
컴퓨터에는 단축키가 많다.
복사할 수도 있고, 붙여 넣을 수도 있고, 검색할 수도 있고, 실행을 취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은 조금 불친절하다.
지나간 시간을 복사할 수도 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를 지운 뒤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한 번 넘어졌던 길에서는 조금 천천히 걷게 되고, 한 번 놓쳤던 것은 다음에는 조금 더 오래 바라보게 된다.
손가락이 단축키를 기억하듯 몸과 마음도 살아온 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조금 나아졌다면, 그건 되돌릴 수 없었던 시간 덕분일지도 모른다.
Alt + 0133.
화면에는 말줄임표 하나가 찍힌다.
…
아직 마침표를 찍을 때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