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패는 아껴두는 게 아니야

'아끼다가 *된다'는 속담이 떠오른 월드컵 축구 3차 예선전

by조선여인

"엄마, 왜 자꾸 아끼는 거야. 싱싱하고 좋은 것을 먼저 먹어야지."
엄마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입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래된 음식을 처리하느라 쩔쩔매고 있는 엄마를 보는 게 싫었다. 아무리 잔소리해도 고쳐지지 않는 아끼는 병. 나의 잔소리는 언제쯤 멈추게 되는 걸까.

"사람이 아낄 줄도 알아야지, 어떻게 좋은 것만 먹고 산다니?"
나한테 돌아오는 엄마의 타박도 매번 똑같다.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아도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다. 좋은 것은 아껴두고 시든 것만 꾸역꾸역 먹는 동안, 옆에 둔 좋은 것은 서서히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반대로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먼저 먹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먹을 때마다 '가장 좋은 상태'의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될 테다.

엄마를 보며 답답해하지만 사실 나도 좋은 건 아껴두고 싶은 심리가 있다. 나중에 먹어야지, 더 좋은 날 써야지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구석진 곳에 처박혀 비틀어져 가는 걸 발견하고야 탄식한다. 왜 그랬을까, 속이 쓰리지만 이미 회생은 불가능하다. 내 불찰로 썩혀버렸으니 어쩌겠나, 버리는 수밖에. 왜 가장 좋은 것을 아껴두려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좋은 걸 아끼는 이 병은 아무도 못 말린다.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끼다가 일을 그르쳤던 경우를 떠올리라 하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가장 아쉬움이 컸던 사건이 있다. 20여 년 전 학교에서 일어났던 허탈했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몇 번의 예선전을 거쳐 마지막 관문만 넘으면 교육청 대표로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표선수 여섯 명은 퇴근도 미루며 맹연습을 이어갔다. 서울시교육청 주최 교직원배드민턴대회에 출전할 학교를 뽑는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경기 진행은 선발 명단을 제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상대편이 어떤 선수를 내보낼지 모르는 상황이라 남자복식, 여자복식, 혼합복식 명단을 작성할 때 눈치작전이 치열하다. 남자복식부터 시작하고 여자복식을 하는데 1대 1 상황이 되었을 때만 혼합복식으로 승부를 가르게 된다. 상대편 남자 선수들의 실력이 막강하다는 소문이 돌자, 30년 경력의 고수였던 우리 감독 선생님은 묘바카라을 냈다. 어차피 우리 학교는 여자선수가 강하니 승산이 낮은 남자복식은 과감히 포기하자고. 혼합복식에서 승부를 내자는 전략이었다.

문제는 우리 팀에서 가장 잘하는 에이스를 세 번째 순서인 혼합복식으로 돌려버린 것이다. 이 청년은 손목의 유연함을 위해 라켓 대신 망치를 휘두르며 잠을 잔다는 승부 근성이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자나 깨나 연습하여 2년 만에 전국청년대회 1등을 거머쥔 최고의 카드였다. 명단을 제출하자마자 상대편은 우리의 패를 다 읽은 듯 얼굴에 회심의 미소를 보였다. 계획한 대로 남자 경기는 패했고, 모든 기대가 걸린 여자복식마저 접전 끝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리 학교 최고의 카드는 라켓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한 채 주저앉았다. '다음'을 위해 아껴둔 에이스가 무용지물이 되었을 때의 그 허탈감과 미안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날 감독은 자신의 불찰을 사과했고, 이듬해 우리는 교육청 대표로 뽑혀 서울시교육청 교직원배드민턴대회가 열리는 잠실 경기장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 '아끼다 망하는 만고강산의 진리'를 온 나라가 목격하는 애석한 일이 또 일어났다. 월드컵 본선 진출 여부가 걸린 마지막 예선 경기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붉은 악마 응원복까지 맞춰 입고 시애틀의 동생, 밴쿠버의 딸아이까지 단체카톡방으로 불러 모아 만반의 응원 준비를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무승부만 되어도 본선에 간다고들 하지만 긴장 없는 응원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모든 경기는 발 빠른 선제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법이 아닌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 일찌감치 TV 앞에 앉은 나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발 명단에 손흥민 선수가 빠져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해설에 설마, 눈에 힘을 주며 화면을 보니 정말이었다. 손흥민 이름이 빠졌다는 사실에 갑자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물론 모든 선수가 다 잘한다고는 해도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는 것과 없는 건 하늘과 땅 차이다.

나는 얼른 이 사실을 톡방에 올렸다.
"얘들아, 큰일 났어. 손흥민 선수가 빠졌다는 게 사실이네."
"나중에 쓰려고 아껴두는 거겠지."
가족과 동생들의 대수롭지 않은 답변에 내 속만 괜히 조마조마해졌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입장할 때 선수들의 표정이 예전 같아 보이지 않았던 게. 세계적인 주장선수가 빠진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선수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각종 큰 대회 때마다 함께 연습하던 선수가 빠졌을 때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축구란 혼자 개인기로 하는 게 아니라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며 헌신해야 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계적인 에이스가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선수들의 사기와 흐름을 단숨에 흔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흐름으로 경기가 흘러갔다. 발동작은 패스는 어긋났고, 전반전 내내 공격도 없이 끌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대편은 경계대상 1순위가 빠진 것을 알고 쾌재를 불렀을 게 뻔했다. 후반전에 에이스가 투입되었으나 이미 상대편으로 넘어간 분위기를 되찾아 오기란 역부족이었다. 무승부만 되어도 자력으로 32강에 진출할 좋은 기회였는데. 졸전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은 선수들은 무슨 잘못인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경기를 보는 내내 실감할 수 있었다.

'아끼면 똥 된다'는 속담. 우리 조상들이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낸 말이다. 냉장고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만고의 진리다. 감독은 가장 날카로운 무기는 시작부터 휘둘러야 한다는 걸 왜 몰랐을까. 강력한 카드를 아끼고 미루면 결국 꺼내 보지도 못한 채 억울함만 남긴다는 걸 왜 몰랐을까. 가장 좋은 걸 아끼려다 물거품이 되어버린 진리를 축구장에서도 목격했으니 이 허망함은 아주 오래갈 것 같다.

그날 저녁에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아끼면 안 돼요. 좋은 것부터 얼른 잡수셔야 해요."
이번에는 엄마도 내 말에 깊이 동감하는 목소리였다. 데이케어센터에서 친구분들과 단체로 경기를 지켜보다가 끝내는 속상했다면서. 엄마는 당장이라도 아끼는 병을 고쳐보겠다는 심산인지 내 지청구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려, 걱정 마. 이제부터 좋은 건 아끼지 않고 먼저 먹으마."

아까운 카드, 손흥민 선수를 4년 뒤에 꼭 다시 볼 수 있는 행운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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