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축구광이다
비장한 마음으로 옷장을 열었다. 깊숙한 곳에 두었던 작은 상자가 나왔다. 뚜껑을 열고 가지런히 들어있는 붉은 티셔츠 석장을 꺼내 들었다. 4년 동안 숨죽이며 기다려온 응원복이다. 우리 가족은 의식을 치르듯 붉은 옷을 입고 응원할 것이다. 멕시코 고지대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훈련하고 있을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들을 위하여.
우리 가족은 축구광이다. 축구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애들이 어렸을 때부터 월드컵이 열리면 물 만난 고기처럼 축구장 주위를 돌며 응원했다. 거리의 대형 화면 앞에서도 껑충껑충 뛰면서 진심을 쏟아 환호했다. 경기가 새벽에 있다해도 냄비뚜껑을 마주들고 응원하다가 경비실의 호출을 받은 적도 많다. 2002년에는 상암동에서 열린 터키와 중국전을 관람하며 월드컵을 즐겼다. 사상 최초로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달성한 기쁨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그때는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자동차 경적을 울려가며 함께 기뻐하지 않았나.
2026년 북중미월드컵대회는 오는 7월 20일까지 열린다. 우리 가족한테는 축제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출전국이 늘어나서 역대 최다 경기를 즐길 수 있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행복을 낚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결승전에는 대회 최초로 선보이는 하프 타임 쇼까지 열린다고 한다. 손흥민을 비롯한 우리 선수들이 가는 곳마다 멕시코인들이 환영한다고 하니 이 또한 흐뭇한 소식이다. K팝이건 K축구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세계로 떨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월드컵 기간마다 하나로 똘똘 뭉쳤던 우리 가족은 이번에는 양 갈래로 나뉘었다. 딸아이가 캐나다에 있어 함께 응원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 와중에 캐나다에서 일어나는 월드컵 소식을 보내왔다. 동영상 속의 밴쿠버 광장은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모여 완전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가 오전일 때 그곳은 저녁 무렵이어서 화려한 빛축제처럼 비쳤다. 갖가지 축구 관련 조형물이 세워진 광장에서 축구 개최국으로서의 위상도 엿볼 수 있었다. 매일 광장에 나가 세계인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딸아이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서 안심했다. 응원은 비록 떨어져서 하지만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하나로 뭉쳤으니. 우리 가족은 정말 못 말리는 축구광이다.
개막식에 앞서 나는 축구 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대진 시간표를 찾아보았다. 본선에 진출한 나라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유독 반짝였다. 나는 색도화지를 준비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손글씨로 대진표를 만들기 시작했다. 바카라을 읽다가 가슴을 울리는 문구는 필사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축구로 이름을 날리는 친근한 나라부터 처음 진출하여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나라까지 정성껏 적었다. 시간표를 빼곡히 적어가는 동안에도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얼마나 고된 훈련과 우여곡절을 겪으며 본선까지 올라왔을까. 지역별 예선을 통과하여 월드컵 본선 무대에 섰다는 것만도 장하고 위대한 일이다. 예선전이 열릴 때마다 우리 가족은 손에 땀을 쥐며 응원했다. 완성한 대진표를 TV 옆에 바짝 붙여 놓았다. 40여 일간 무한한 즐거움을 선사해 줄 모든 선수의 안녕도 함께 빌면서. 승패도 중요하지만 거친 파울에 의해 선수들이 다치는 일은 없기를 바랬다.
며칠 전, 지인한테 북중미 월드컵 경기를 어디서 응원할 거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16강 올라가면 그때 응원하면 되지 뭐."
예선을 통과하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쉬우면 뭔 걱정인가. 16강에 올라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문제다. 강력한 응원의 기운을 선수들에게 전달한다면 혹시나 모를까. 우리가 힘을 모아 응원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마음은 이미 멕시코 운동장으로 가 있다.
우리 태극전사팀은 체코를 2대 1로 이기면서 기분 좋게 출발했으나 멕시코에는 0대 1로 졌다. 일찌감치 격전지에 도착하여 고지대 기후에 적응했으나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을 터. 경기를 대등하게 잘 치르고도 뼈아픈 실점을 하는 바람에 3차전에 대한 부담감이 배로 커졌다.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마지막 예선이라는 숙제를 잘 해결해야만 앞이 보인다. 그 어느 경기 때보다 응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6월 25일 오전 10시!
멕시코 경기장 위에서 피 끓는 질주를 보여줄 대한의 우리 선수들. 이날을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선수들이 아낌없는 능력을 발휘해 주길.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이기면 32강에 올라 LA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선수들에게 필요한 건 국민의 무한한 지지와 사랑이다. 우리 가족의 힘찬 기운과 전 국민의 응원을 하나로 모아 멕시코로 보내련다. 비록 지구 반대편이라도 우리의 염원이 먼 우주를 돌아 선수들한테 가 닿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 가족은 붉은 악마 응원복을 입고 서울과 밴쿠버에서 힘차게 파이팅을 외칠 것이다.
"32강, 고지를 향하여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