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

by서영수

<롤리타>로 유명한 러시아 출신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그의 단편소설 <베를린 안내>는 1925년에 발표된 짧은 작품으로, 나보코프가 베를린 망명 시절에 쓴 초기 단편이다. 제목과 달리 이 작품은 베를린의 명소를 소개하는 관광 안내문이 아니다. 오히려 하수도관과 노면전차, 동물원, 맥줏집 같은 평범한 사물과 장소들을 통해 시간과 기억의 결을 더듬는 작품에 가깝다.


이야기는 베를린에 머무는 러시아 망명자인 화자가 늘 같이 술을 마시는 친구와 맥줏집에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곳에서 친구에게 자신이 경험한 베를린의 몇 가지 사소한 장면과 장소를 소개한다.


특이한 건, 주인공이 남들은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집 앞의 하수도관이며 거리를 오가는 노면전차, 동물원, 그리고 심지어 맥줏집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설명한다는 거다. 오죽하면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가 "참 시시한 안내군. 자네가 어떻게 노면전차를 타고 베를린 수족관에 가는지 누가 관심이나 있겠나?" 하고 말했을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가 인상 깊었던 건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주변 환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다. 이렇게 디테일하게 주변을 기억하려면 내 생각에는 며칠 동안 그 장면만 지켜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아주 꼼꼼하게. 시간도 시간이지만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현상이나 장소 앞에 오래 머문다는 것이 처음에는 무용한 일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 모두 사라질 장면이나 사람들인데도 나보코프는 주목했다. 처음에는 천재 작가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쯤으로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주인공은 말한다.


"말이 끌던 그 궤도차는 사라졌고 전차도 사라질 테니, 2020년대 베를린에서 어떤 괴짜 작가가 지금 우리 시대를 묘사하고 싶다면 기술사 박물관에 가서 백 년 된 노면전차가 있는 곳을 찾아내고, 옛 복식 박물관을 뒤져 반짝이는 단추가 달린 차장의 검은색 제복을 끄집어내야 할 거야.


그때는 모든 것이 가치 있고 유의미하겠지.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말이야. 차장의 돈 가방, 차창을 뒤덮은 광고 전단, 그리고 우리 증손자들이 상상해 볼지도 모를, 노면전차 특유의 그 덜컹거리는 움직임까지도. 모든 것이 세월이 흘렀다는 이유로 고귀한 것이 되고 정당화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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