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법칙도 진화한다

기술시스템 진화법칙 (TESE)

by한유신

Trends of engineering systems evolution (TESE)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을 모두 썼다.

자동문에서 시작해 전구와 결재, 신호등, 하이패스, 스마트폰, 스마트키, 금속활자와 나무판을 거쳐 길이를 재는 도구까지 왔다. S커브부터 시작했으니 생각보다 긴 여정이었다.

MATRIZ(국제트리즈협회)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익숙하지 않은 목록이 나타났다.

S커브 진화.

가치 증가.

인간 관여 감소.

트리밍 정도 증가.

흐름 향상.

제어 가능성 증가.

내가 알고 있던 아홉 가지 법칙과 이름도 다르고 개수도 달라서 잠시 당황했다.

새로운 법칙이 추가된 것일까?

자료를 확인해 보니 진화법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화법칙을 설명하는 체계가 진화한 것이었다.


알트슐러와 초기 TRIZ 연구자들은 다양한 기술과 특허의 발전과정에서 반복되는 방향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여덟 가지 법칙이 정역학, 운동학, 동역학이라는 세 묶음으로 정리되었고, 이후 역동성 증가가 아홉 번째 법칙으로 추가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도 이 고전적 분류였다.


시스템이 출현하기 위한 법칙: 시스템 완전성, 에너지 전도성, 시스템 리듬 조화

시스템이 성장하는 법칙: 이상성 증가, 시스템 불균일 발전,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

시스템이 새로운 형태로 전환되는 법칙: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 물질-장 연관성 증가, 역동성 증가


처음 세 법칙은 기술시스템이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자동문은 사람에게 있던 에너지원과 제어 기능을 시스템 안으로 가져왔다. 전구는 에너지가 빛까지 도달하는 경로를 줄였고, 신호등은 각각의 속도보다 서로의 장단을 맞추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다음 세 법칙은 이미 존재하는 시스템이 가치를 높이며 성장하는 방향을 보여주었다.

하이패스는 요금징수 기능을 유지하면서 정차와 현금, 차단기와 사람의 행동을 줄였다. 스마트폰은 화면과 인공지능, 배터리와 충전 시스템이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모순을 만들었다. 자동차 열쇠는 모노시스템에서 바이시스템과 폴리시스템을 거쳐 스마트폰과 자동차가 연결된 상위시스템으로 이동했다.


마지막 세 법칙은 기술이 더 작고 정밀하며 유연한 형태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금속활자는 한 장의 판을 글자로 나누었고, 프린터는 글자를 다시 작은 점과 입자로 나누었다. 나무판에 구멍을 만들기 위해 기계적인 힘뿐 아니라 음파와 열, 화학반응과 전기, 자기와 전자기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막대자는 접히고 말리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버리고 빛으로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아홉 가지 법칙은 서로 다른 기술에서 반복되는 진화의 방향을 비교적 간결하게 보여주었다.


image.pnghttps://wiki.matriz.org/


현재 MATRIZ는 기술시스템 진화경향을 아홉 개의 독립된 목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가장 위에는 S커브 진화경향이 놓인다. 각각의 MPV는 시간에 따라 S자 모양의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시스템이 S커브를 따라 계속 성장하려면 해당 MPV에서 시스템의 가치가 증가해야 한다. 그래서 S커브 바로 아래에는 가치 증가경향이 놓인다.

가치 증가 아래에는 다섯 개의 중심축이 배치된다.


상위시스템으로의 전이 경향 (Trend of Transition to the Supersystem)

시스템 구성요소 완전성 증가 경향(Trend of Increasing Completeness of System Components)

조화 증가 경향 (Trend of Increasing Coordination)

트리밍 정도 증가 경향 (Trend of Increasing Degree of Trimming)

흐름 향상 경향 (Trend of Flow Enhancement)


이 중심축 아래에 다시 인간 관여 감소, 구성요소의 불균일 발전, 제어 가능성 증가와 역동성 증가 같은 하위경향과 내부 메커니즘이 연결된다. 현재 TESE는 평평한 목록이 아니라 상하관계가 있는 계층적인 구조다.


인간 관여 감소(Trend of Increasing Completeness of System Components)는 시스템 완전성 증가의 하위경향이다. 사람이 수행하던 전달, 에너지원, 제어와 의사결정 기능을 시스템이 차례로 가져가면서 사람의 개입이 줄어드는 방향이다.

조화 증가는 과거의 리듬 조화보다 범위가 넓다. 구성요소의 리듬뿐 아니라 형상, 재료와 작용방식까지 서로 맞춰지는 방향을 포함한다. 현재 MATRIZ는 불균일 발전과 제어 가능성 증가를 이 경향의 하위경향으로 배치한다.

역동성 증가는 다시 제어 가능성 증가의 메커니즘으로 들어간다. 시스템이 먼저 변할 수 있어야 그 변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제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 9법칙과 현재 TESE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체계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대부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이 바뀌고, 범위가 넓어지고, 더 큰 경향 아래로 이동했을 뿐이다.


고전적 9법칙 → 현재 MATRIZ TESE에서의 변화

시스템 완전성 → 시스템 구성요소의 완전성 증가로 유지되고, 인간 관여 감소가 하위경향으로 분리됨

에너지 전도성 → 물질·에너지·정보를 모두 다루는 흐름 향상으로 확대됨

시스템 리듬 조화 → 형상·리듬·재료·작용까지 포함하는 조화·정합 증가로 확대됨

이상성 증가 → 가치 증가라는 이름으로 S커브를 움직이는 상위경향에 배치됨

시스템 불균일 발전 → 조화 증가의 하위경향으로 배치됨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 → 현재 체계에서도 중심축으로 유지됨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 → 역동성과 제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재배치됨

물질-장 연관성 증가 → 기계적 측면은 역동성으로, 에너지·정보 측면은 제어 가능성으로 나뉘어 반영됨

역동성 증가 → 제어 가능성 증가의 하위 메커니즘으로 유지됨


MATRIZ의 공식 설명도 고전적 법칙과 현재 TESE 사이에 단절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 기존 법칙들이 더 실무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이름이 바뀌고 세분화되거나, 더 넓은 범주 아래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에너지 전도성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에너지가 모든 구성요소에 잘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현재의 흐름 향상경향은 에너지뿐 아니라 물질과 정보의 흐름까지 다룬다. 전달경로를 줄이고, 변환단계를 줄이며, 병목과 정체구간을 없애고, 유용한 흐름은 더 잘 이용하며 유해한 흐름은 차단하거나 회수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우리가 전구와 결재를 한 글에서 함께 다룬 것도 결과적으로 이 변화와 잘 맞았다.

전구에서는 에너지의 흐름을 보았다.

결재에서는 정보의 흐름을 보았다.


현재 TESE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트리밍 정도 증가경향이다.

트리밍은 단순히 부품을 빼는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구성요소나 공정을 제거하면서도 그 기능은 손상되지 않아야 한다. 사라진 구성요소가 수행하던 유용한 기능을 남은 구성요소나 상위시스템이 대신 수행한다.

부품은 사라지지만 기능은 남는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여러 사례에도 이미 트리밍이 들어 있었다.

하이패스에서는 현금과 직원, 차단기와 전용차로가 줄어들었다. 앞으로 차량과 도로가 직접 정산한다면 하이패스 단말기마저 사라질 수 있다.

스마트키에서는 금속 열쇠가 사라지고 자동차를 사용할 권한이 스마트폰과 자동차, 계정과 인증시스템으로 이동했다.

리모컨도 마찬가지다. 물리적인 리모컨은 줄어들지만 제어 기능은 스마트폰과 음성, 센서와 인공지능으로 이동한다.

고전적 체계에서는 이런 변화를 이상성 증가나 상위시스템 전이 안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 현재 MATRIZ는 구성요소와 공정이 제거되는 방향 자체를 독립된 진화경향으로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현재 MATRIZ 지식베이스의 메뉴만 보면 열한 개의 항목이 나열되어 있다.

그래서 고전적 9법칙이 새로운 11법칙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는 아홉 개가 열한 개로 늘어난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고전 체계는 서로 다른 진화방향을 한 줄씩 나열한 목록에 가까웠다. 현재 TESE는 S커브와 가치 증가를 중심으로 각각의 경향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보여주는 지도에 가깝다.

S커브에서 현재 위치를 먼저 찾는다.

어떤 MPV의 가치를 높여야 하는지 정한다.

그다음 상위시스템 전이, 완전성, 조화, 트리밍과 흐름 향상 가운데 적절한 방향을 선택한다.

필요하면 인간 관여 감소, 불균일 발전, 제어 가능성과 역동성 같은 하위경향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과거의 법칙이 기술의 진화방향을 설명했다면, 현재의 TESE는 그 방향들을 실제 분석과 설계에 사용할 수 있도록 관계를 정리한 체계에 가깝다. MATRIZ도 기존의 설명형 목록이 단계 진단과 발전방향 선택을 돕는 계층형 도구로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현재의 TESE를 살펴보면 진화법칙을 설명하는 체계 자체가 진화법칙을 따라 변했다.

중복되거나 분산되어 있던 개념을 정리하고 트리밍이 일어났다.

서로 떨어져 있던 법칙의 상하관계를 만들면서 조화가 증가했다.

에너지에 머물던 전도성 개념을 물질과 정보로 확대하고 흐름이 향상되었다.

진화방향을 단순히 나열하는 데서 현재 S커브 위치에 따라 적절한 방향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다시 말해 제어 가능성이 높아졌다.


고전적 9법칙이 틀렸기 때문에 새로운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고전적 9법칙이 기술진화를 읽는 뼈대를 만들었고, 현재의 MATRIZ TESE는 그 뼈대를 다시 나누고 연결해 더 정교한 지도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본 아홉 개의 사례도 그대로 의미가 있다.

자동문은 여전히 시스템 완전성을 설명한다.

전구와 결재는 흐름 향상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신호등은 더 넓어진 조화의 한 사례다.

하이패스와 스마트키는 이상성, 상위시스템 전이와 함께 트리밍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금속활자와 나무판, 길이 측정은 제어 가능성과 역동성을 높이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분류는 달라졌지만 기술이 움직이는 방향은 남아 있다.

법칙은 고정된 표가 아니다.

기술이 계속 변하듯 기술을 읽는 언어도 계속 진화한다.



김범수의 지나간다를 진화간다로 들으면서 이 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