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길이 측정

기술시스템 진화법칙 9. 역동성 증가의 법칙

by한유신

이번에는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의 마지막인 역동성 증가의 법칙이다.

역동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물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기술시스템에서 말하는 역동성은 움직이는 속도보다 시스템이 바꿀 수 있는 상태와 자유도가 늘어나는 것에 가깝다.

고정된 구조는 한 가지 상태로만 작동한다. 구조에 관절이 생기면 일부를 움직일 수 있고, 유연한 재료를 사용하면 전체 형태를 바꿀 수 있다. 더 발전하면 물리적인 구조를 움직이지 않고도 기능이나 특성을 바꿀 수 있다. 기술시스템은 고정된 상태에서 조절 가능한 상태로, 다시 환경에 맞춰 스스로 변화하는 상태로 진화한다.

길이를 재는 도구를 보면 이 흐름이 비교적 선명하게 보인다.


길이를 재려면 자를 대야 했다

막대자는 단단하고 길이와 형태가 정해져 있다. 30센티미터 자로 1미터짜리 바카라상을 재려면 자를 여러 번 옮겨야 한다. 자의 끝이 놓였던 위치를 기억하고 다시 이어서 측정해야 한다.

자보다 짧은 물체를 재는 데는 편리하지만 자보다 긴 물체를 만나면 사용자가 움직여야 한다.

긴 물체를 한 번에 재기 위해 자를 길게 만들 수도 있다.

길어진 자는 보관하고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진다.

짧으면 휴대하기 좋지만 긴 거리를 재기 어렵다.

고정된 막대자는 한 가지 형태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는 요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어렵다.

image.pnghttps://kr.made-in-china.com/co_zjmeters/product_Swedish-or-German-Type-Wooden-Folding-Rulers_ensgin

접이식 자는 단단한 자에 관절을 넣었다.

여러 개의 짧은 막대를 경첩으로 연결해 사용할 때는 길게 펼치고, 보관할 때는 짧게 접는다. 각각의 막대는 여전히 단단하지만 연결부가 움직이면서 시스템이 선택할 수 있는 상태가 늘어났다.

처음의 자가 하나의 강체였다면 접이식 자는 여러 강체가 관절로 연결된 구조다.

접이식 자는 막대자의 휴대성 문제를 해결했다. 펼치면 길어지고 접으면 짧아진다. 관절이 정해진 위치에 있기 때문에 움직임은 아직 제한적이다. 완전히 자유롭게 휘거나 둥근 물체의 표면을 따라갈 수는 없다.


관절만 움직이던 자가 몸 전체를 구부렸다

줄자는 접이식 자보다 더 유연하다. 몇 개의 관절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측정하는 띠 전체가 휘어진다. 필요한 길이만큼 꺼내고 사용이 끝나면 다시 말아 넣는다. 길게 펼칠 수 있으면서도 작은 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

단단한 막대자는 직선적인 물체를 재는 데 적합하다. 유연한 줄자는 허리둘레나 원통의 둘레처럼 굽은 표면을 따라갈 수 있다. 물체가 자의 형태에 맞춰야 했던 방식에서, 자가 물체의 형태에 맞추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막대자와 접이식 자, 줄자의 변화를 단순히 신제품이 이전 제품을 대체한 역사로 볼 필요는 없다.

막대자는 짧은 거리를 빠르게 재고 직선을 긋는 데 편리하다. 접이식 자는 단단한 기준면을 유지하면서 길게 펼칠 수 있다. 줄자는 긴 거리나 곡면을 측정하는 데 유리하다.

새로운 방식이 등장해도 이전 방식은 필요한 영역에 남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도구가 더 최신인지가 아니다. 길이를 재는 시스템이 고정된 한 가지 형태에서 벗어나, 측정 대상과 상황에 맞게 자신의 형태를 바꿀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정된 막대 → 관절로 접히는 구조 → 몸 전체가 유연하게 휘고 말리는 구조


두 지점 사이를 잇던 자가 사라졌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에서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

막대자와 줄자는 측정하려는 두 지점 사이를 물리적인 물질로 연결한다. 자의 눈금이나 줄자의 띠가 시작점부터 끝점까지 놓여 있어야 한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는 두 지점 사이에 자를 펼치지 않는다.

장치를 한쪽에 놓고 목표 지점으로 빛을 보낸다. 시스템은 돌아온 신호를 이용해 거리를 계산하고 결과를 숫자로 보여준다. 물리적인 측정자는 두 지점 사이에서 사라지고, 전자기장인 빛이 그 공간을 오간다.


현재의 레이저 거리측정기는 긴 거리를 측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측정값을 저장하고 면적과 부피를 계산하며,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기능까지 결합되고 있다.

막대자는 사람이 눈금을 읽고 계산해야 했다. 줄자는 한쪽 끝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는 한 사람이 떨어진 지점의 거리를 측정하고 계산과 기록까지 하나의 시스템에서 처리할 수 있다.

역동성은 자가 더 많이 움직이는 방향으로만 증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측정하는 물질의 움직임은 줄어들었다. 자의 몸이 사라지면서 측정할 수 있는 거리와 상황은 늘어났다.


막대가 움직였다.

관절이 움직였다.

유연한 띠 전체가 움직였다.

마지막에는 물질 대신 빛이 움직였다.


공간 전체를 읽기 시작했다

레이저 거리측정기를 사용할 때도 사람은 측정할 시작점과 끝점을 정한다. 벽의 길이를 재고, 다시 다른 벽을 측정한 뒤 면적이나 공간의 크기를 계산한다.

공간 스캔 기술은 이 측정방식도 바꾸고 있다.

카메라와 거리센서로 방 안을 비추며 이동하면 시스템이 벽과 문, 창문과 가구의 위치를 인식한다. 측정자가 한 변씩 재지 않아도 공간의 구조를 모델로 만들고 길이와 면적, 부피를 계산할 수 있다. 애플의 룸플랜은 카메라 화면과 실시간 그래픽을 이용해 방을 스캔하고, 완료된 공간 모델을 사용자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측정의 대상이 선 하나에서 공간 전체로 확장된 것이다.


두 점 사이에 자를 댄다 → 필요한 길이만큼 자를 펼친다 → 빛을 보내 두 점 사이의 거리를 잰다

→ 공간을 훑고 여러 치수를 한꺼번에 계산한다


미래에는 사람이 측정하겠다고 마음먹고 도구를 꺼내는 행동도 줄어들 수 있다.

건물과 로봇, 자동차가 주변 공간을 계속 감지한다면 시스템은 자신의 위치와 주변 물체 사이의 거리를 이미 알고 있을 수 있다. 가구를 들여놓기 전에 들어갈 수 있는지 확인하고, 사람이 지나갈 통로가 충분한지 판단하며, 공간의 변화도 자동으로 기록할 수 있다.

측정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자신의 크기와 상태를 계속 알려주는 방식이다.


처음의 자는 단단한 막대였다.

정해진 길이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자는 관절을 얻어 접혔다.

몸 전체가 유연해지면서 말리기 시작했다.

마지막에는 두 지점 사이를 잇던 물리적인 몸을 버리고 빛으로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점과 점 사이의 거리만 재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읽고 그 안의 길이와 면적, 부피를 함께 계산하려 한다.


역동성 증가의 법칙은 기술이 더 많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정된 한 가지 상태에서 벗어나 더 많은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되는 진화다. 형태를 바꾸고, 작동방식을 바꾸며,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몸을 다른 장으로 대신한다.

막대자에서 접이식 자와 줄자로 이동하는 동안 측정도구의 형태는 유연해졌다.

레이저 거리측정기에서는 형태보다 측정 기능이 유연해졌다.

공간 스캔에서는 무엇을 잴 것인지 사람이 하나씩 지정하던 방식까지 달라지고 있다.

길이를 재는 기술은 자를 더 길게 만드는 방향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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