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은 꼭 드릴로 뚫어야 할까

기술시스템 진화법칙 8. 물질-장 연관성 증가의 법칙

by한유신

이번에는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의 여덟 번째인 물질-장 연관성 증가의 법칙이다.

이름부터 어렵다.

물질은 알 것 같은데 ‘장’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물리학 교과서처럼 느껴진다.

물질-장 모델을 이해하려면 먼저 기술시스템의 기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술시스템의 기능은 대개 하나의 물질이 다른 물질에 작용하면서 발생한다.

망치가 못을 때린다. 칼이 재료를 자른다.

여기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작용하는 물질이 있고 작용을 받는 물질이 있다. 두 물질 사이에서 힘과 에너지를 전달하는 장이 있다.

드릴로 나무판에 구멍을 뚫는다면 드릴날은 작용하는 물질이고 나무판은 작용을 받는 물질이다. 드릴날의 회전력과 압력이 두 물질 사이에서 작용하는 기계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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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Z에서는 이 세 요소의 관계를 물질-장 모델이라고 부른다.

작용하는 물질이나 작용받는 물질, 둘 사이의 장 가운데 하나가 빠져 있으면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필요한 두 물질과 장이 갖추어지면 완전한 물질-장 시스템이 된다.

물질-장 시스템은 다음에 다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물질-장 시스템에서는 사용되는 장도 달라진다.


기계장 → 음파장 → 열장 → 화학장 → 전기장 → 자기장 → 전자기장


TRIZ에서는 기술시스템이 기계적인 작용에서 음파와 열, 화학, 전기, 자기, 전자기장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모든 기술이 이 순서를 빠짐없이 거치면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의 특성과 목적에 따라 필요하지 않은 장은 건너뛸 수 있다. 기존의 장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계속 사용한다. 하나의 장으로 충분하지 않으면 여러 장을 결합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같은 기능을 다른 물질과 장의 관계로 수행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다.


강의에서 나는 이런 질문을 한다.


나무판에 구멍을 하나 뚫어야 한다. 어떻게 뚫어야 하는가?

대부분 비슷하게 대답한다.

송곳, 못, 드릴.

틀린 답은 아니다. 드릴날을 회전시키고 나무판에 밀어 넣으면 나무의 일부가 깎여 나가면서 구멍이 생긴다. 우리가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질문을 조금 바꿔본다.

드릴을 사용하지 않고도 구멍을 뚫을 수 있을까?


갑자기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문제에서 요구한 것은 구멍이다. 드릴을 사용하라는 조건은 없다. 구멍이 둥글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고, 가장자리가 매끄러워야 한다는 말도 없다.

사람들은 문제를 듣는 순간 익숙한 해결방법을 떠올린다. 그 해결방법에 맞춰 문제에 없던 조건까지 추가한다.

구멍은 둥글어야 한다. 가장자리는 깨끗해야 한다.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은 하나뿐이다.

나무판을 관통하는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구멍의 크기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구멍을 만들면 된다.



송곳과 못, 드릴은 기계장을 이용한다.

공구가 나무판에 직접 접촉한다.

기계장을 사용하는 방식도 계속 발전했다.

손으로 송곳을 돌렸고 손잡이가 달린 수동 드릴을 사용했고 모터가 들어간 전동드릴로 바뀌었다. 회전속도와 토크를 조절하고 나무의 상태에 따라 출력을 바꾸는 장치도 추가되었다.

기계장은 오래된 방식이지만 여전히 나무판에 구멍을 뚫는 가장 유용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진화법칙이 기계장을 버리고 반드시 다른 장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른 장을 사용하면 새로운 해결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계적인 힘에 초음파 진동을 더할 수도 있다. 공구에 빠르고 미세한 진동을 주면 단순히 누르거나 회전시키는 방식과 다른 가공이 가능해진다.

음파장이 나무판에 직접 구멍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음파장이 기계장과 결합해 공구의 작용을 돕는다.

하나의 장을 사용하던 시스템에 다른 장이 추가되면서 물질-장 관계가 복잡해진다.



나무를 반드시 깎아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쇠막대를 뜨겁게 달군 뒤 나무판에 대면 나무가 탄화되고 열분해된다. 계속 열을 가하면 나무판을 관통할 수 있다.

드릴로 만든 구멍처럼 깨끗하지 않을 수 있고 구멍 주변이 검게 타고 모양이 일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구멍의 품질이 전제조건에 없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일단 구멍은 만들어졌다.

기계장이 나무를 깎아냈다면 열장은 나무의 상태를 바꾸어 제거한다.


화학적인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특정 부분에 염산이나 황산과 같은 화학물질을 작용시켜 나무를 약하게 만들거나 분해한 뒤 제거하는 방식이다. 실제 현장에서 얼마나 빠르고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는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은 최종 해결안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해결안을 넓히는 일이다.


전기 아크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강한 전기장을 가하면 공기가 이온화되고 아크가 발생한다. 아크는 높은 온도를 만들어 그 열을 나무판의 한 지점에 집중시키면 나무가 열분해 되면서 구멍이 생길 수 있다.




최선의 해결안과 가능한 해결안은 다르다. 가능한 해결안을 충분히 만든 뒤에야 무엇이 가장 적합한지 비교할 수 있다.


레이저는 전자기장을 이용한다.

빛에너지를 아주 작은 위치에 집중하면 나무를 태우고 제거할 수 있다.

기계식 공구는 나무와 접촉하면서 마모된다. 레이저에는 나무와 접촉하는 드릴날이 없다. 빛을 조사하는 위치와 시간, 세기를 조절해 나무에 작용한다.

드릴과 레이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진화한 방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두꺼운 나무판에 구멍을 빠르게 뚫어야 한다면 드릴이 적합할 수 있다. 공구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나 아주 작은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면 레이저가 유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드릴이 레이저로 대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계적인 접촉으로만 수행하던 기능을 전자기장으로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질-장 연관성 증가의 법칙은 항상 가장 뒤에 있는 장을 사용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해결해야 할 기능에 따라 가장 적합한 장을 선택하게 한다.


지금까지 사용한 장을 다시 살펴보자.

드릴과 송곳에서는 기계장을 사용했다.

초음파 진동을 더해 음파장도 사용했다.

달군 쇠막대에는 열장이 있었다.

나무를 분해하는 화학장도 생각했다.

전기 아크에서는 전기장과 열장을 연결했다.

레이저에서는 전자기장을 사용했다.


기계장 → 음파장 → 열장 → 화학장 → 전기장 → 자기장 → 전자기장


그런데 자기장만 없다.

실제 강의에서 나는 잠시 기다린 뒤 말한다.


“다른 장은 모두 있었는데 자기장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마침내 자기장을 찾아냈습니다.”


“자기야, 이것 좀 뚫어줘.”


대부분 여기에서 웃는다. 아니 웃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물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장은 아니다. 직접 해결하지 않고 '자기'라는 사람인 상위시스템의 자원을 활용한 해결안에 가깝다.

그래도 강의가 끝난 뒤 사람들이 가장 잘 기억하는 장은 대개 이 자기장이다.


물질-장 연관성 증가는 장을 바꾸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처음의 질문은 단순했다.

나무판에 구멍을 하나 뚫어야 한다.

구멍은 기계적인 힘으로 만들 수 있다. 음파와 열, 화학반응과 전기, 자기와 전자기파를 이용할 수도 있다. 각각의 장을 따로 사용하기도 하고 여러 장을 연결하기도 한다.

모든 기술이 정해진 순서대로 진화하지는 않는다. 사용하는 장과 발전의 순서는 달라도 방향은 닮아 있다.


이렇게 물질-장이 진화하는 것을 알면 미래에 어떤 장을 활용할지 알 수 있다.

자동차 엔진도 증기기관에서 내연기관을 거쳐 전기장이 적용되고 있다.

전기장 다음은 자기장과 전자기장이다. 미래에는 자기장과 전자기장을 이용한 자동차가 나올 수도 있다.

또한 활용되지 않은 장이 적용된 자동차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를 해결할 때 장(Field)만 바꿔 생각해도 주변에서 천재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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