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된 금속활자

기술시스템 진화법칙 7.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

by한유신

이번에는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의 일곱 번째인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 법칙이다.

이름만 보면 큰 기계가 점점 작아지는 과정처럼 들리지만 실제 의미는 조금 다르다.

제품의 외형이 작아지는 것보다 기능을 수행하는 단위가 작아지는 것에 가깝다.


큰 하나가 하던 일을 작은 여러 요소가 나누어 맡는다.

각각의 요소를 필요한 위치와 시간에 따로 작동시킬 수 있게 된다.

큰 구조로 한꺼번에 처리하던 일을 작은 단위로 나누면서 시스템은 더 세밀하고 정교해진다.

기술시스템이 점점 더 작은 물질구조를 사용하고, 물질과 에너지의 세분화 정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한다.


작은 단위를 다룬다는 것

큰 하나는 단순하다.

한 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필요한 부분만 따로 바꾸기는 어렵다.

작은 여러 요소로 나누면 상황이 달라진다.

필요한 요소만 선택할 수 있고 각 요소에 서로 다른 역할을 줄 수도 있다.

전체를 바꾸지 않고 일부만 수정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커다란 절삭날 하나가 물체의 표면을 깎을 수 있다. 수많은 작은 연마입자는 표면의 작은 부분을 나누어 가공하면서 더 매끄럽고 정밀한 결과를 만든다.

굵은 물줄기 하나는 한 곳에 많은 물을 보낸다. 물줄기를 작은 방울로 나누면 더 넓은 면적에 필요한 양만큼 고르게 보낼 수 있다.

세분화는 단순히 크기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시스템이 선택하고 조절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늘리는 일이다.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에는 크게 네 가지 세분화가 있다. 물질, 공간, 표면, 흐름이다.

물질의 세분화는 하나의 큰 물질을 여러 개의 작은 요소로 나누는 것이다. 큰 칼날 하나가 하던 일을 수많은 작은 입자가 나누어 수행할 수 있다. 작은 요소들은 서로 다른 재료나 성질을 갖도록 만들 수도 있고, 필요한 만큼만 조합할 수도 있다.

공간의 세분화는 하나로 이어진 공간을 여러 영역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의 공간에서는 모든 위치가 비슷한 조건을 갖는다. 공간을 나누면 구역마다 온도와 압력, 기능과 사용 목적을 다르게 설정할 수 있다. 냉장고 안에 냉장실과 냉동실, 채소실이 나뉘는 것도 공간의 세분화로 볼 수 있다.

표면의 세분화는 하나의 균일한 표면을 작은 기능 영역으로 나누는 것이다. 타이어 표면에 홈을 만들면 물이 빠져나갈 길이 생기고 노면과의 마찰도 달라진다. 방열판에 수많은 얇은 핀을 만들면 공기와 닿는 면적이 넓어져 열을 더 잘 내보낼 수 있다. 표면은 단순한 바깥면에서 여러 기능을 수행하는 미세한 구조로 바뀐다.

흐름의 세분화는 하나의 큰 흐름을 여러 개의 작은 흐름으로 나누는 것이다. 샤워기는 굵은 물줄기 하나를 여러 개의 가는 물줄기로 나눈다. 분무기는 물을 더 작은 방울로 만들어 필요한 면적에 고르게 전달한다. 흐름이 작게 나뉠수록 양과 방향, 도달하는 위치를 더 정확하게 조절할 수 있다.

무엇을 나누든 목적은 비슷하다. 더 작은 단위를 더 정확하게 다루기 위해서다.


금속활자는 한 장의 판에서 글자를 떼어냈다

인쇄기술 진화에서도 이 법칙을 볼 수 있다.

금속활자 이전의 목판인쇄에서는 한 페이지에 글과 그림을 판 하나에 새겼다. 같은 내용을 여러 장 찍을 수 있었지만 글자 하나가 잘못되거나 내용이 바뀌면 판의 해당 부분을 다시 손보거나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했다.

금속활자는 한 장의 판에 붙어 있던 글자를 떼어냈다.

한 장을 글자라는 작은 단위로 나누고 필요한 글자를 골라 다시 조합할 수 있게 했다. 인쇄가 끝나면 활자를 분리해 다른 문장을 만드는 데 다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한 페이지를 새긴 판 → 분리된 글자 → 글자를 다시 조합한 페이지

금속활자는 단순히 나무를 금속으로 바꾼 기술이 아니라 인쇄의 기본 단위를 페이지에서 글자로 세분화한 기술이었다.

활자식 인쇄와 타자기에서도 글자 하나가 기본 단위였다. ‘가’라는 글자를 찍으려면 ‘가’라는 모양을 가진 활자나 글쇠가 필요했다. 종이에 찍히는 글자와 기계 안에 있는 글자의 형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트매트릭스 프린터가 등장하면서 글자라는 물리적인 형상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작은 핀들이 필요한 위치만 두드리면 여러 개의 점이 모여 글자가 되었다. ‘가’ 모양의 활자가 없어도 점의 위치를 바꾸면 ‘가’도 만들고 ‘나’도 만들 수 있었다. 같은 점으로 숫자와 기호, 선과 간단한 그림도 출력할 수 있었다.

글자를 표현하는 최소 단위가 활자에서 점으로 이동한 것이다.

잉크젯 프린터에서는 작은 핀이 종이를 두드리지 않는다. 미세한 잉크방울을 필요한 위치에 분사한다. 레이저 프린터도 글자 모양의 활자를 직접 찍지 않는다. 감광드럼의 작은 영역을 선택하고, 미세한 토너 입자를 필요한 위치에 붙여 글자와 이미지를 만든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완성된 글자와 사진이다.

프린터가 실제로 다루는 것은 수많은 작은 점과 입자다.

한 장의 판 → 하나의 글자 → 여러 개의 점 → 미세한 잉크방울과 토너 입자

목판, 금속활자, 타자기, 도트매트릭스, 잉크젯과 레이저 프린터를 하나의 직선적인 발명 순서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각 기술은 서로 다른 목적에 따라 등장했고 일부는 지금도 사용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기술이 이전 기술을 완전히 없앴는지가 아니다.

인쇄 기능을 수행하는 기본 단위가 어떻게 작아졌는지를 보는 것이다.

마하젯 프린터는 1초에 한 장을 인쇄한다고 개발했다. 나도 참여했지만 다음 제품은 못 만들었다.


image.png출처 LG전자


글자는 남았지만 활자는 사라졌다

금속활자는 한 장의 판에서 글자를 분리했다.

도트매트릭스 프린터는 글자를 점으로 나누었다.

잉크젯과 레이저 프린터는 그 점을 미세한 방울과 입자로 만들었다.

인쇄기술은 더 큰 힘으로 종이를 누르는 방향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글자와 그림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고, 그 작은 단위를 필요한 위치에 정확하게 배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글자를 활자 단위로 다룰 때는 활자에 없는 모양을 찍기 어려웠다. 점을 기본 단위로 사용하면서 하나의 프린터로 글자와 사진, 도형과 색을 모두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위가 작아질수록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많아졌다.

작은 단위는 하나만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다. 잉크방울 하나와 토너 입자 하나만으로는 글자를 만들 수 없다. 수많은 작은 요소가 정확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을 때 하나의 글자와 사진이 나타난다.


우리가 종이에서 보는 것은 하나의 글자다.

프린터가 다루는 것은 수많은 작은 점이다.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은 단순히 작아지는 진화가 아니다.

큰 하나를 움직이는 기술에서 작은 여러 요소를 필요한 위치에 정확하게 놓는 기술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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