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시스템 진화법칙 6 상위시스템으로 이동 법칙
자동차 문을 열 때 차 키를 꺼내지 않는다. 차 키를 주머니에 넣은 채 손잡이를 잡으면 문이 열린다. 자동차에 올라 시동 버튼을 누르면 엔진이 작동한다. 트렁크 앞에 서면 트렁크가 자동으로 열리기도 한다.
차 키는 분명 가지고 있지만 차 키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
예전에는 자동차 문에 금속 열쇠를 꽂아 돌렸다. 차에 올라 같은 열쇠를 시동장치에 다시 꽂고 돌려야 했다. 지금은 열쇠가 자동차에 닿지 않아도 문이 열리고 시동이 걸린다.
차 키의 모양만 바뀐 것은 아니라 차 키와 자동차의 관계가 달라졌다.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차 키가 없었다.
초기의 자동차는 문과 천장이 없는 개방된 형태가 많아 별도의 잠금장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엔진을 작동시키기 위해 사람이 직접 크랭크 핸들을 돌리기도 했다.
열쇠를 꽂고 돌려 시동을 거는 턴키 스타터 방식은 1949년에 자동차에 도입되었다. 내연기관 자동차가 등장한 뒤 오랫동안 자동차는 지금과 같은 차 키 없이 움직였던 셈이다.
자동차가 보급되고 개인의 중요한 재산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나 자동차의 문을 열고 시동을 걸어서는 안 되었다. 자동차를 움직이는 기능만큼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능이 중요해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료에서는 차 키의 역할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https://www.hyundaimotorgroup.com/ko/story/CONT0000000000001667)
하나는 자동차 문을 잠그고 여는 보안 기능이다.
다른 하나는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도록 시동을 허용하는 기능이다.
두 기능을 조금 더 넓게 묶으면 차 키의 본질이 보인다.
자동차를 사용할 권한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허용된 사람이 자동차의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차 키는 단순히 문을 여는 쇳조각이 아니라 자동차의 사용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도구다.
트리즈에는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 법칙이 있다.
기술시스템은 하나의 모노시스템에서 두 시스템이 결합한 바이시스템으로, 다시 여러 시스템이 결합한 폴리시스템으로 발전한다. 충분히 발전한 시스템은 독립된 제품으로 남지 않고 자신의 기능을 더 큰 상위시스템에 넘기기도 한다.
이를 단순히 물건의 개수가 늘어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부족하다.
새로운 시스템이 결합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기능이 생긴다. 기능이 늘어날수록 시스템 사이의 관계도 복잡해진다. 여러 기능이 하나의 제품 안에서 통합되고, 어느 순간에는 그 제품 자체가 더 큰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
차 키의 진화는 이 흐름을 비교적 분명하게 보여준다.
금속 열쇠라는 모노시스템
→ 금속 열쇠와 리모컨이 결합한 바이시스템
→ 인증과 원격제어 기능이 통합된 스마트키라는 폴리시스템
→ 스마트폰과 자동차, 계정으로 기능이 이동한 상위시스템
마지막에는 열쇠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
처음 자동차 키는 금속으로 만든 기계식 열쇠였다.
열쇠 표면에는 자동차마다 다른 홈과 패턴이 새겨져 있어 그 모양이 자물쇠와 맞으면 자동차 문이 열렸다.
시동장치에 열쇠를 꽂고 돌리면 엔진이 작동했다.
문을 여는 기능과 시동을 거는 기능이 있었지만 두 기능 모두 금속 열쇠와 자물쇠가 직접 맞물리는 하나의 기계적 원리를 사용했다.
이 단계에서 자동차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열쇠의 모양이 맞는지만 확인했다. 열쇠를 가진 사람이 자동차의 소유자인지, 빌린 사람인지, 훔친 사람인지는 구분하지 못했다. 금속의 홈이 맞으면 문이 열리고 시동이 걸렸다.
자동차를 사용할 권한과 금속 열쇠라는 물건이 거의 같은 의미였던 셈이다.
1980년대에는 무선 주파수를 이용해 자동차 문을 원격으로 여닫는 리모컨키가 등장했다.
버튼을 누르면 멀리서 자동차 문을 잠그거나 열 수 있었다. 차종에 따라 경적과 불빛을 작동시켜 주차장에서 자동차의 위치를 확인하고, 창문이나 트렁크를 열거나 미리 시동을 거는 기능도 추가되었다.
시동을 걸 때는 여전히 금속 열쇠를 꺼내 시동장치에 꽂고 돌려야 했다.
기계식 열쇠 + 전자식 원격제어장치
서로 다른 두 시스템이 하나의 차 키 안에서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금속 열쇠는 자동차에 직접 접촉해 문과 시동장치를 움직였다. 리모컨은 무선신호로 떨어진 곳에서 자동차에 명령을 전달했다.
여기에 보안 기능도 강화되었다.
자동차의 전자제어장치가 칩의 정보를 인증해야만 시동이 걸렸다.
자동차가 사람을 알아본 것은 아니라 허가된 키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차 키는 자물쇠를 돌리는 도구에서 원격으로 명령을 전달하고 사용 권한을 증명하는 시스템으로 확대되었다.
스마트키가 등장하면서 여러 기능이 하나의 시스템 안으로 들어왔다.
자동차는 사용자가 가까이 오면 스마트키의 신호를 확인한다. 손잡이를 잡으면 문이 열리고, 자동차 안에서 시동 버튼을 누르면 엔진이 작동한다. 트렁크를 열거나 문을 잠그기 위해 차 키를 직접 꺼낼 필요도 없다.
스마트키는 자동차와 통신하며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사용 권한을 확인하고 문을 열고 잠근다.
트렁크와 창문을 작동시키고 시동을 건다.
자동차의 위치를 알리거나 원격으로 자동차를 움직이는 기능까지 수행하기도 한다.
현대자동차그룹 자료에서도 스마트키가 자동차와 통신해 접근을 인식하고 잠금장치와 편의 기능을 작동시키며, 버튼 시동과 원격 스마트 주차 같은 기능까지 지원한다고 설명한다.
기계식 열쇠, 원격제어, 사용자 인증, 접근 감지와 시동 허가가 하나의 폴리시스템으로 통합된 것이다.
기능은 많아졌지만 사용자가 해야 할 행동은 줄었다.
예전에는 열쇠를 꺼내 방향을 맞추고 자물쇠에 꽂아 돌려야 했지만 스마트키에서는 차 키를 가지고 자동차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 여러 과정이 시작된다.
시스템은 복잡해졌지만 사용자에게 보이는 과정은 단순해졌다.
복잡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서 스마트키와 자동차 내부로 이동했다.
스마트키의 다음 진화는 버튼을 더 많이 붙이는 것이 아니었다.
차 키의 기능이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019년 출시된 8세대 쏘나타에 적용된 디지털키는 스마트폰만으로 자동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 수 있도록 했다. 자동차 키를 별도의 물건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실행되는 프로그램으로 바꾼 것이다.
디지털키는 근거리 무선통신과 저전력 블루투스 등을 통해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연결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동차를 빌려줄 때 물리적인 차 키를 직접 건넬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사용 권한을 보낼 수 있다. 사용 기간을 정하거나 트렁크처럼 특정 기능만 사용할 수 있도록 권한을 제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단계에서 차 키의 기능은 하나의 물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은 사용자의 신원을 확인한다.
자동차는 접근한 사람에게 권한이 있는지를 판단한다.
계정과 인증시스템은 권한을 만들고 전달하며 취소한다.
자동차와 스마트폰, 통신망과 사용자 계정이 하나의 상위시스템을 구성한다.
차 키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금속 열쇠가 화면 속 아이콘으로 바뀌었다는 뜻만은 아니다.
자동차를 사용할 권한이 특정한 물건에서 벗어나 관리하고 전달할 수 있는 정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열쇠는 더 많은 기능을 가진 물건이 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기능을 더 큰 시스템에 넘기기 시작했다.
디지털키 다음에는 스마트폰조차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자동차가 지문이나 얼굴, 홍채와 목소리 같은 생체정보를 확인한다면 사람은 별도의 차 키를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현대자동차는 2018년 중국형 싼타페에 지문으로 자동차 문을 열고 시동을 걸 수 있는 시스템을 적용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자료는 향후 지문뿐 아니라 홍채와 안면, 음성과 발걸음 같은 생체정보가 자동차의 사용자 인증에 활용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차 키를 가진 사람을 확인하던 자동차가 사람 자체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가족에게는 자동차 전체를 사용할 권한을 줄 수 있다.
대리운전기사에게는 정해진 시간 동안만 운전할 수 있는 권한을 줄 수 있다.
택배 기사에게는 일정 시간 트렁크만 열 수 있도록 허용할 수도 있다.
공유차량에서는 자동차를 예약한 사실 자체가 열쇠가 된다. 이용시간이 시작되면 사용 권한이 생기고, 이용이 끝나면 권한도 사라진다.
자율주행 이동서비스에서는 승객이 차 키를 받을 이유가 없다. 차량이 예약된 승객을 확인하고 스스로 문을 열면 된다.
이 단계에서 열쇠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다.
누가, 언제, 어느 자동차의 어떤 기능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권한이다.
차 키는 자동차 문을 여는 도구에서 사람과 자동차의 관계를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이동한다.
처음의 금속 열쇠는 하나의 기계적 원리로 자동차 문과 시동장치를 작동시키는 모노시스템이었다.
리모컨 기능이 결합하면서 기계식 열쇠와 전자식 원격제어가 함께 작동하는 바이시스템이 되었다.
스마트키는 인증과 접근 감지, 원격제어와 시동 허가를 하나로 통합한 폴리시스템이 되었다.
디지털키에서는 그 기능이 스마트폰과 자동차, 계정과 통신망으로 이동했다.
Mono-system → Bi-system → Poly-system → Super-system
이 진화 과정은 기술이 반드시 더 크고 복잡한 제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하나의 시스템에 새로운 기능이 붙는다. 둘이 결합하고 다시 여러 기능이 하나의 제품 안으로 들어온다.
기능이 충분히 발전하면 제품은 자신의 기능을 더 큰 상위 시스템에 넘기고 사라진다.
스마트키는 열쇠의 완성형이 아닐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