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패스 진화

이상성 증가의 법칙

by한유신

요금은 남고 요금소는 사라진다


예전에 남산 터널을 지나려면 통행료를 내야 했다.

요금소 직원에게 돈을 건네는 방식도 있었지만 동전을 바구니에 직접 던져 넣는 곳도 있었다.

창문을 열고 동전을 준비한 뒤 바구니를 향해 던지고 동전이 제대로 들어가면 그대로 지나갔다.

나는 차를 완전히 세우지 않고도 동전을 제법 잘 넣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는 속도가 줄지 않고도 넣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작은 기술이었다.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통행료를 내고 싶어 했다.



도로에 요금을 부과하는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도심에서는 자동차 이용을 줄이고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요금을 부과할 수 있고 터널이나 교량처럼 특정 시설을 이용한 대가를 받기도 한다.


우리는 고속도로 통행료로 범위를 좁혀보려고 한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 한 번 만들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로를 포장하고 교량과 터널을 관리하며 파손된 시설을 보수해야 한다. 또한 제설과 안전관리, 교통정보 제공에도 지속적으로 비용이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는 통행료는 해당 도로 신설, 개축과 유지, 수선 비용을 충당하는 용도로 제한된다.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는 주된 이유는 도로를 이용한 차량에 그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비용의 일부를 부담시키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통행료 징수 시스템의 기능은 비교적 분명하다.

고속도로 이용에 따른 비용을 이용자에게 정확하게 부과하고 정산한다.


자동차를 세우는 것은 기능이 아니다.

통행료를 정산하기 위해 필요했던 방법이었다.



초기의 통행료 징수 방식은 눈에 잘 보였다.

자동차가 요금소 앞에 멈추고 운전자는 창문을 열고 현금을 건네면 직원은 돈을 확인하고 잔돈과 영수증을 돌려주었다. 차단기가 올라가면 자동차는 다시 출발했다.

통행료 한 번을 내기 위해 여러 요소가 필요했다.

요금소가 필요하고 차단기가 필요했다.

통행권과 현금, 직원과 영수증이 필요했다.

운전자는 속도를 줄이고 멈추고 창문을 열고 요금을 낸 뒤에는 다시 출발해야 했다.


자동차 한 대가 정차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요금소 앞에 줄이 생긴다. 80년대 귀성길은 아래 사진과 같았다.

동전 바구니는 그 과정의 일부를 줄였다. 직원과 돈을 주고받는 일이 없어졌다. 잔돈과 영수증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정해진 동전을 준비했다면 완전히 멈추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었다.

사람의 행동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동전을 준비하고 창문을 열고 바구니를 향해 정확히 던져야 했다.

그래도 통행료를 내는 데 필요한 과정은 조금 줄어들었다.

image.pnghttps://www.wikitree.co.kr/articles/689472



하이패스가 등장하면서 더 많은 것이 사라졌다.

운전자는 현금을 준비하지 않고 창문도 열지 않는다.

직원에게 돈을 건네지도 않고 잔돈과 영수증을 기다리지 않는다.

자동차는 정해진 차로를 지나고 통행료는 연결된 결제수단을 통해 처리된다.

요금을 내지 않는 것은 아니라 오히려 통행료를 확인하고 정산하는 기능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운전자가 해야 했던 행동이 줄어든 것이다.


TRIZ에는 이상성 증가의 법칙이 있다.

기술시스템은 유용한 기능은 유지하거나 높이고 비용과 유해한 기능은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필요하지 않은 구성요소를 제거하고 다른 자원에 기능을 넘기거나 작동 원리를 바꾸기도 한다.

궁극적으로는 시스템 자체가 사라져도 필요한 기능이 수행되는 상태를 지향한다.

하이패스는 통행료 징수 기능을 강화하면서 정차와 현금, 대기와 반복 행동을 줄였다.

이상성의 증가는 기능을 계속 추가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빠른 차단기를 설치하는 것도 개선이다.

요금소 직원을 늘리는 것도 대기시간을 줄일 수 있다.

하이패스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자동차는 반드시 멈춰야 할까?
운전자가 직접 돈을 건네야 할까?
차단기는 반드시 있어야 할까?


통행료를 더 빨리 받는 기술에서 통행료를 받는 과정 자체를 줄이는 기술로 이동한 것이다.

예전에는 톨게이트에서 표 받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하이(Hi~!)라고 인사할 수 있었는데 이젠 인사도 패스한다.




초기의 하이패스는 전용 차로를 통과해야 했다.

운전자는 미리 차선을 바꾸어야 했다. 하이패스 차량과 일반 차량이 서로 다른 길로 들어갔다. 통행료를 내는 행동은 줄었지만 운전자는 여전히 하이패스 차로를 찾아야 했다.

다차로 하이패스는 차로를 좁히거나 차단기 앞에서 속도를 크게 줄이는 부담을 줄인다. 한국도로공사도 여러 차로에서 보다 자연스럽게 통과할 수 있는 다차로 하이패스를 확대하고 있다.

차량번호를 자동으로 확인하는 방식도 사용되고 있다. 원톨링 시스템에서는 중간 요금소에 정차하지 않아도 자동영상촬영 장비가 차량번호를 확인하고, 최종 출구에서 통행료를 한 번에 정산한다.

통행료 징수 시스템의 진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동차가 멈추고 직원에게 현금을 건넨다. → 운전자가 동전을 바구니에 직접 넣는다.→ 카드와 자동수납기로 요금을 낸다. → 하이패스 전용차로를 지나며 자동으로 낸다.→ 여러 차로를 자연스럽게 지나며 자동으로 낸다.→ 차량번호나 차량정보만으로 이용 사실을 확인하고 정산한다.


진화할수록 통행료를 징수하는 기능은 더 정확해지고 운전자가 해야 하는 행동은 줄어든다.

미래에는 하이패스 단말기도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image.png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4/0004428250


자율주행차는 자신의 통행료를 낼 수 있을까

자율주행차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어느 도로에 진입했고 어느 구간을 지나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자동차와 도로, 결제계정이 연결된다면 차량이 유료도로 이용기록을 확인하고 필요한 비용을 자동으로 정산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동차의 모든 운행기록을 중앙시스템에 보낼 필요는 없다.

어느 유료구간에 들어갔는지,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떤 차종이며 얼마를 정산해야 하는지와 같은 최소한의 정보만 사용할 수 있다.

도로의 장비가 통과 사실을 확인하고 차량이 자신의 이용구간을 계산한 뒤, 두 기록이 일치하면 비용을 정산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

개인 차량이라면 소유자의 계정에서 요금이 빠져나간다.

자율주행 택시라면 운영회사가 통행료를 정산한 뒤 승객의 이동요금에 포함할 수 있다.

공유차량이라면 실제 이용자의 사용료에 도로 이용비가 함께 계산될 수 있다.

이때는 운전자가 통행료를 낸다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차량이나 이동서비스가 이용한 도로의 비용을 스스로 정산한다.

하이패스는 더 성능이 좋은 단말기로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와 도로, 결제 시스템 안으로 흡수될 수 있다.


통행료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을까?

여기서 더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비용을 다른 방법으로 마련할 수 있다면 통행료를 따로 받을 필요가 있을까?

고속도로 관리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할 수도 있다.

자동차를 보유하거나 사용하는 비용에 도로 이용료를 포함할 수도 있다.

월정액 이동서비스에 고속도로 이용료가 들어갈 수도 있다.

자율주행 택시를 이용할 때 승객은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의 이동요금만 낼 수 있다. 그 안에서 전기료와 차량 유지비, 보험료와 고속도로 통행료가 운영회사와 관련 시스템 사이에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경우 도로를 유지하는 비용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통행료가 별도의 결제 행위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전기요금을 낼 때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시설의 사용료를 각각 따로 결제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통행료는 다른 이동비용 안으로 흡수될 수 있다.


반대 방향의 진화도 가능하다.

도로의 혼잡을 줄이고 이용시간을 분산하는 기능이 중요해지면 통행료는 더 세밀해질 수 있다.

한산한 시간에는 요금이 낮아지고 혼잡한 시간에는 높아진다.

자율주행차는 시간과 비용을 비교해 덜 막히고 더 저렴한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이때 통행료는 단순한 건설비 회수 수단이 아니라 도로 이용량을 조절하는 정보가 된다.

통행료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고, 다른 비용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며, 시간과 혼잡도에 따라 더 정교하게 달라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하이패스 형태가 계속 남느냐가 아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한 비용을 마련하고 이용량을 조절하는 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느냐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문제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차량의 이동정보가 지나치게 수집될 수 있고 잘못된 통행료가 부과될 수도 있다.

계정이 해킹되거나 결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요금이 어떤 기준으로 계산되었는지 이용자가 알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진정한 이상성 증가는 요금소와 단말기를 없애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정산은 정확해야 하고 필요한 정보만 사용해야 한다.

요금 산정 기준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오류가 생기면 쉽게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사용자가 해야 할 행동은 줄어들지만 사용자의 권리까지 함께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


이상적인 하이패스는 하이패스가 없는 상태다

처음에는 자동차를 세우고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

동전을 바구니에 던지며 지나가기도 했다.

하이패스가 등장하자 완전히 멈추지 않고 통행료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전용차로와 단말기가 없어도 차량을 확인하고 비용을 정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율주행 시대에는 자동차가 자신이 이용한 도로를 확인하고 스스로 비용을 처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통행료가 이동서비스나 다른 비용체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사람은 별도의 통행료를 낸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있다.


도로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비용은 계속 필요하다.

도로 이용을 조절하는 기능도 남을 수 있다.

요금소와 차단기, 하이패스 단말기와 결제를 위해 사람이 해야 했던 행동은 점차 줄어든다.


이상적인 하이패스는 더 빠른 하이패스가 아니라 하이패스가 없어도 필요한 정산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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