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시스템은 어디로 진화하는가
(사진 설명. 아이스크림도 진화한다. 아이스크림-청소년스크림-어른스크림)
기술은 제멋대로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소재가 등장하고 성능이 높아지고 기능이 추가된다. 어느 날 전혀 다른 제품이 나타나 기존 제품을 밀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긴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서로 다른 기술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반복된다.
사람이 하던 일이 기계 안으로 들어간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길은 짧아진다.
하나의 제품이 여러 제품과 결합한다.
큰 구조가 작은 구조로 나뉜다.
고정된 시스템이 조절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뀐다.
TRIZ를 만든 알트슐러는 수많은 특허를 분석하면서 기술시스템의 발전과정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형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를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으로 정리했다. 진화법칙은 발명원리와 문제해결 기법이 만들어지는 이론적 기반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S커브가 기술시스템의 현재 위치를 판단하는 도구라면,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은 앞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다.
진화법칙이 특정 제품의 미래를 정확히 맞혀주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기술의 발전과정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 방향을 바탕으로, 다음 모습을 예측하고 새로운 해결안을 찾게 해주는 사고도구에 가깝다.
TRIZ의 기술시스템 진화법칙은 다음 아홉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시스템 완전성의 법칙: 필요한 구성요소를 갖추고 스스로 기능을 수행한다
2 에너지 전도성의 법칙: 에너지 전달경로를 짧게 하고 손실을 줄인다
3 시스템 리듬 조화의 법칙: 구성요소의 시간과 속도, 주기를 서로 맞춘다
4 이상성 증가의 법칙: 유용한 기능은 높이고 비용과 유해한 영향은 줄인다
5 시스템 불균일 발전의 법칙: 뒤처진 구성요소에서 모순과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6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 법칙: 하나가 둘과 다수가 되고 더 큰 시스템에 통합된다
7 거시계에서 미시계로의 이동 법칙: 큰 구조에서 작고 세분화된 구조로 이동한다
8 물질-장 연관성 증가의 법칙: 물질 사이의 작용을 더 정밀하게 감지하고 제어한다
9 역동성 증가의 법칙: 고정된 시스템에서 조절되고 적응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시스템은 필요한 구성요소를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기술시스템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려면 기본적인 구성요소가 필요하다.
대상에 직접 작용하는 도구, 에너지를 전달하는 트랜스미션, 에너지를 공급하는 엔진, 작동상태를 조절하는 제어장치다.
초기 시스템은 이 가운데 일부가 없거나 사람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손펌프를 생각해 보자.
사람이 손잡이를 움직인다. 사람의 힘이 펌프 내부로 전달되고, 펌프가 물을 이동시킨다. 여기서 사람은 에너지원이면서 동시에 제어장치다.
전동펌프가 되면 모터가 사람의 힘을 대신한다. 수위센서와 제어기가 추가되면 물이 부족할 때 펌프가 스스로 작동하고, 일정한 수위에 도달하면 멈춘다.
시스템이 발전할수록 사람이 하던 기능이 하나씩 시스템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직접 작동시키는 시스템에서 필요한 구성요소를 갖추고 스스로 기능을 수행하는 시스템으로 이동한다.
이것이 시스템 완전성의 법칙이다.
에너지가 이동하는 길은 짧아진다
에너지가 전달되는 과정이 길어질수록 손실이 발생한다.
하나의 에너지가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여러 번 바뀌면 시스템은 복잡해진다. 부품이 늘어나고, 마찰과 진동이 발생하며, 제어도 어려워진다.
과거의 공장에서는 하나의 중앙 모터가 긴 축과 벨트를 통해 여러 기계를 움직였다. 모터의 동력이 축과 벨트, 기어를 거쳐 각 기계에 전달되었다.
이후에는 기계마다 별도의 모터가 설치되었다.
더 나아가 모터가 구동축과 직접 연결되는 직접구동 방식이 등장했다
중앙에서 만든 에너지를 멀리 전달하는 방식에서 필요한 위치에서 직접 에너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동한 것이다.
기술시스템은 에너지 변환단계와 전달경로를 줄이고, 손실이 적으며 더 쉽게 제어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빠른 것보다 서로 맞는 것이 중요하다
시스템의 각 구성요소가 모두 빠르게 움직인다고 좋은 시스템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시간과 속도가 맞아야 한다.
컨베이어가 제품을 빠르게 운반하더라도 로봇이 제품을 집는 속도와 맞지 않으면 제품이 쌓이거나 떨어질 수 있다. 앞 공정의 생산속도와 뒤 공정의 처리속도가 다르면 한쪽에서는 대기시간이 생기고 다른 쪽에서는 과부하가 발생한다.
리듬 조화는 무조건 속도를 높이는 법칙이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동작이 일어나도록 각 구성요소의 장단을 맞추는 법칙이다.
구성요소의 작동주기와 자연주파수를 맞추고, 유용한 공진은 활용하며, 해로운 진동과 주기적 작용은 피하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발전한다.
더 많은 가치를 더 적은 부담으로 제공한다
기술은 대개 더 높은 성능을 향해 발전한다.
하지만 성능만 높아진다고 좋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성능을 높이기 위해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크기와 무게가 커지고, 에너지 사용과 소음이 증가한다면 이상적인 발전이라고 보기 어렵다.
TRIZ에서 이상성은 다음과 같은 방향을 뜻한다.
유용한 기능은 증가한다. 비용과 유해한 기능은 감소한다.
진공청소기를 예로 들면 흡입력은 높아지되 무게와 소음, 소비전력은 줄어드는 방향이다. 청소하는 기능은 그대로 수행하지만 사용자가 느끼는 부담은 감소해야 한다.
궁극적인 이상시스템은 시스템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필요한 기능은 수행되는 상태다.
문을 열기 위해 사람이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는 대신, 사람이 다가오면 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처럼 기능은 남고 사용자의 행동과 부담은 줄어든다.
이상성 증가의 법칙은 나머지 진화법칙들이 향하는 공통된 기준이라고도 볼 수 있다.
모든 구성요소는 같은 속도로 발전하지 않는다
복잡한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한다.
스마트폰의 처리속도와 화면, 카메라 기능은 빠르게 발전했다. 그러나 배터리의 사용시간이 같은 속도로 늘어나지 못하면 충전 문제가 커진다.
자동차의 속도는 높아졌지만 제동기술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안전 문제가 발생한다.
시스템에서 가장 앞선 부분보다 뒤처진 부분이 전체 성능의 한계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차이가 모순을 만든다.
성능을 높이면 발열이 증가한다.
기능을 늘리면 배터리가 빨리 소모된다.
크기를 줄이면 강도나 효율이 떨어진다.
따라서 새로운 혁신은 이미 빠르게 발전한 부분을 더 개선하는 데서 나오기보다, 전체 발전을 막고 있는 뒤처진 구성요소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시스템의 다음 문제는 가장 약한 부분에 숨어 있다.
구성요소의 발전속도가 균일하지 않고, 그 차이에서 발생한 모순을 해결하며 시스템이 발전한다는 것이 불균일 발전의 법칙이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수가 된다
하나의 시스템이 어느 정도 발전하면 비슷한 시스템과 결합한다.
단일 카메라는 두 개의 카메라가 되고, 다시 여러 개의 카메라로 늘어난다. 각각의 카메라는 광각, 망원, 심도 측정처럼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TRIZ에서는 이 흐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노시스템 → 바이시스템 → 폴리시스템
단순히 개수가 늘어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같은 시스템을 여러 개 사용해 성능을 높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시스템을 결합해 새로운 기능을 만들 수도 있다.
더 발전하면 독립된 시스템 자체가 사라지고 그 기능이 더 큰 상위시스템으로 흡수되기도 한다.
카메라가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 것이 대표적이다. 카메라는 독립된 촬영기기에서 통신, 편집, 저장, 공유가 연결된 상위시스템의 구성요소가 되었다.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 법칙은 기술의 미래가 제품 내부의 개선에만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품 하나를 더 좋게 만드는 것보다 그 제품이 어떤 시스템과 결합할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큰 구조가 하던 일을 작은 구조들이 나누어 수행한다
기술시스템은 점점 더 작고 세분화된 물질구조를 사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초기에는 하나의 큰 칼날이 물체를 자르거나 깎았다.
이후에는 수많은 작은 연마입자가 표면을 가공한다. 각각의 입자는 매우 작지만, 많은 입자가 함께 작용하면서 큰 칼날로는 만들기 어려운 정밀한 표면을 만든다.
큰 광원 하나를 사용하는 대신 수많은 작은 발광소자를 배열할 수도 있다. 각각을 따로 제어하면 밝기와 색상, 위치를 더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소형화가 아니다.
시스템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어 기능을 더 정밀하게 제어하는 것이다.
물질뿐 아니라 공간과 표면, 에너지와 흐름도 더 작은 단위로 분할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단순한 접촉에서 감지하고 제어하는 상호작용으로
기술시스템의 기능은 물질과 물질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망치가 못을 때린다.
히터가 물을 데운다.
브레이크 패드가 바퀴의 회전을 줄인다.
여기에 힘이나 열, 전기, 자기와 같은 장이 작용한다.
초기의 시스템은 물질 사이의 단순한 접촉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에는 새로운 물질과 장이 추가되면서 작용을 감지하고 측정하며 제어할 수 있게 된다.
물탱크의 물을 데우는 시스템을 생각해 보자.
히터가 계속 작동하면 물은 뜨거워진다. 그러나 현재 온도를 알 수 없다면 필요 이상으로 가열될 수 있다.
온도센서를 추가하면 물의 상태를 측정할 수 있다. 제어장치는 측정된 온도에 따라 전기에너지를 조절한다.
단순히 열을 전달하던 시스템이, 상태를 감지하고 필요한 만큼만 작용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한 것이다.
물질-장 연관성 증가의 법칙은 물질 사이의 작용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하고 복합적인 상태로 발전하고, 측정과 피드백, 더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장을 활용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고정된 시스템에서 스스로 변하는 시스템으로
초기의 기술시스템은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한 번 만들어지면 형태와 위치, 작동조건을 바꾸기 어렵다.
이후에는 시스템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음에는 일부만 움직이고, 더 발전하면 여러 부분을 각각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의자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는 높이와 각도가 고정된 의자였다.
이후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등받이와 팔걸이도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더 발전하면 사용자의 체형과 자세를 감지해 스스로 각도를 조절할 수도 있다.
안테나도 비슷하다.
고정된 방향으로만 전파를 보내던 안테나에서, 안테나 전체를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안테나가 움직이지 않아도 전자적으로 전파의 방향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물리적인 움직임은 오히려 줄었지만, 조절할 수 있는 상태는 늘어났다.
따라서 역동성은 많이 움직이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가 늘어나는 것이다.
기술시스템은 고정된 구조에서 움직이는 구조로, 조절 가능한 구조로, 다시 주변환경을 감지하고 스스로 적응하는 시스템으로 발전한다.
아홉 가지 진화법칙을 배웠다고 해서 모든 시스템에 아홉 가지를 모두 적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법칙은 빈칸을 채우는 체크리스트가 아니다.
먼저 시스템의 과거 변화를 살펴야 한다.
무엇이 빠르게 발전했는지 무엇이 뒤처져 있는지 현재 어떤 모순과 병목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다음 현재 시스템과 가장 관련이 높은 법칙을 선택한다.
어떤 시스템에서는 역동성 증가가 가장 중요한 방향일 수 있다.
다른 시스템에서는 상위시스템으로의 이동이 새로운 성장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시스템에서는 에너지 전달경로를 줄이거나, 뒤처진 구성요소를 해결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법칙을 많이 적용한다고 좋은 예측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스템의 과거와 현재를 가장 잘 설명하는 법칙을 찾고, 그 법칙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기술의 미래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진화법칙은 미래의 답을 알려주는 공식이 아니다.
과거에서 어떤 트렌드를 따라 현재에 이르게 되었으면 그 법칙에 따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