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을 꼼꼼하게 짜는 편이 아니다. 업무도 그렇고 여행도 그렇다. 이번 여름에는 7일 동안 발리를 다녀왔는데, 준비라고 해봐야 출발 전날 캐리어를 싼 정도였다. 어디를 갈지, 뭘 먹을지,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도 거의 정하지 않았다. 발리에 도착한 뒤 아침마다 휴대폰을 켜고 그날 가고 싶은 곳을 찾았다. 마음에 들면 가고, 아니면 말았다. 7일짜리 해외여행치고는 상당히 성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나는 루틴을 좋아한다. 하루가 크게 변하지 않는 게 좋고,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게 편하다. 내가 특히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갑작스러운 외출이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를 가자고 하면, 목적지가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일단 마음부터 불편해진다. 이쯤 되면 나도 내가 계획적인 사람인지 무계획적인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 큰 계획은 싫어하면서도, 내 생활의 리듬이 깨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인 것 같다.
대신 그 루틴 안에서 무언가를 꾸준히 이어가는 건 좋아한다. 실제로도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다면 매일 해야 하고, 하기 싫은 날에도 해야 하고, 결국 오래 버틴 사람이 잘하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는 내가 재미없는 일을 오래 못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그렇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어도 그렇고, 나중에 돈이 될 것 같은 일도 그렇다. 처음에는 꽤 열심히 한다. 이번에는 진짜 오래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계획도 세운다. 그런데 재미가 없으면 어느 순간 그 일이 하고 싶은 일에서 해야 하는 일로 바뀐다. 그때부터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다.
오늘은 바쁘니까 내일 해야지.
내일은 피곤하니까 주말에 해야지.
주말에는 다음 주부터 제대로 해야지.
요즘 아내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아내도 무언가를 해보려 꾸준히 시도하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고 있는데, 어떤 영상을 만들어야 할지 자주 고민한다. 나도 글을 쓰면서 비슷한 고민을 한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글은 뭘까. 어떤 주제를 써야 계속 읽을까. 그래서 둘이 종종 각자 만들고 있는 것을 두고 얘기를 한다.
아내는 어떤 영상을 올려야 할지 이야기하고,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이야기한다.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착한다. 일단 우리가 재미있어야 한다.
조회수가 잘 나오는 영상이나 사람들이 많이 읽을 것 같은 글을 고민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만드는 사람이 재미가 없어진다. 그러면 오래 하기 어렵다. 영상을 만드는 사람도 자기가 재미있어야 하고, 글을 쓰는 사람도 자기가 재미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이유도 단순하다. 아내가 만든 영상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아내다. 만들면서 보고, 편집하면서 보고, 올린 다음에도 또 본다. 내 글도 마찬가지다. 글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아마 나일 것이다. 쓰면서 읽고, 고치면서 읽고, 올린 뒤에도 다시 들어가서 본다. 정작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재미없는데 다른 사람이 재미있기를 바라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나는 이런 방식이어야 오래 하는 사람인 것 같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중간에 그만두면 내가 꾸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의지가 약해서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계속하지 못했던 이유가 꼭 의지 때문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냥 재미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일을 재미로 할 수는 없다. 회사 일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 가끔은 글쓰기도 귀찮다. 매일 재미있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정말 오래 가져가고 싶은 일이라면 그 안에서 적어도 하나는 내가 재미있어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발리 여행도 그랬다. 7일짜리 여행 계획은 하나도 안 세웠지만, 매일 아침 그날 뭘 할지 찾아보는 건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재미있었다. 계획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7일 동안 매일 계획을 세웠다. 단지 미리 한달 전에는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영상을 만드는 아내도, 글을 쓰는 나도 일단 우리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어차피 그 영상과 글을 가장 많이 볼 사람도 우리 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