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었다.
할머니는 평생 왼쪽 팔을 쓰지 못하셨다.
막내 삼촌은 중증 지적장애인으로 태어났다.
아픔이 낯선 집안이 아니었으니,
어쩌면 나는 그 안에서 나름의 단단한 무언가를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굿을 하셨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선명하게 신명을 쏟아내 근방에서 이름이 알려진 무당이셨다.
어릴 적 열병으로 평생 세상을 볼 수 없었다는 분이,
평생을 팔도를 돌아다니며 누구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난 셈이다.
잃은 것이 있으면 어디선가 다른 무언가가 채워지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아프면서, 무엇을 얻게 되었을 것일까.
어머니가 시집을 왔을 때 삼촌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속옷을 입혀 놓으면 어느새 찢기를 반복했다.
집안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그저 밥을 먹이고, 잠잘 곳을 내어주는 정도였다.
삼촌은 하루 종일 때양볕 아래 밭을 매는 엄마만 바라보며 기다렸다고 한다. 식구들이 먹고 남긴 찬밥이라도, 더 먹으려고.
어머니는 삼촌이 끝없이 먹으려 해서 밥을 많이 줄 수가 없었고 항상 숨겨놔야 했다고 얘기하곤 했다.
알아듣는 말은 하나뿐이었다고 했다.
밥 먹으라는 말. 그 말뿐이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열 번씩 도망가고 싶었다고,
자신의 선택을 끊임없이 후회했다고 훗날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셨다. 발목을 잡은 것은 자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었다
희생을 알아달라는 것인지, 보상을 받고 싶다는 것인지.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어머니는 자식을 넷이나 낳으셨으니까.
삼촌이 백 킬로그램이 되었다.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때쯤 어머니의 마음속에는 연민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같이 죽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고, 어머니는 담담히 말씀하셨다.
어느 날은 시아버지에게 매달리며 울었다고 했다. 삼촌이 언제 죽는지 알려달라고. 팔도를 떠돈다는 무당 시아버지에게, 속내를 털어낸 것이다.
그 말을 꺼낼 때마다 어머니의 표정에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히려 그 시절 자신이 얼마나 고단했고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내세우듯, 담담했다.
온 동네가 홍콩 독감으로 앓아눕던 시절에도 삼촌은 끄떡없었단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방문을 잠근 채 혼자 숨을 거두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스물네 살이었다.
언젠가 할아버지가 지나는 말로 삼촌이 죽을 거라고 했던, 그 나이였다.
언니의 기억으로는, 한쪽 팔을 평생 쓰지 못하셨던 할머니가 남은 한 손으로 백 킬로그램 넘는 삼촌을 끌어안고 하루 종일 우셨다고 했다. 한 손밖에 없는 사람이, 백 킬로그램 죽은 자식을 안고 우는 모습. 그 장면이 어린 언니의 눈에 박혀 평생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가 세상에서 극단의 슬픔을 보았던 그날이, 어머니에게는 해방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울었을까.
아니면 오래 기다려온 무언가로부터 풀려났다고 느끼셨을까.
삼촌이 죽던 그해,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다.
아무 말도 알아듣지 못했던 삼촌은 장례식도 없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결혼을 하지 않아 선산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서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사람이, 죽어서도 그러했다.
내가 심한 발작으로 쓰러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삼촌을 가장 먼저 떠올렸고 오랫동안 외면해서 위치도 알 수 없는 삼촌의 묘를 찾아 나서셨다.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확신에 차서 말씀하시곤 했다.
삼촌의 한이 나를 통해 돌아왔다고.
버려진 삼촌, 공동묘지에 묻힌 삼촌이 나를 빌미를 잡아 한을 푸는 것이고,
남의 한은 풀어주던 시아버지는 제 손녀는 건지지 못했다고.
어머니에게 나의 발작은, 처음부터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또 자신의 이야기였다
나는 ‘집안의’ 내력 속에서 아팠고, 그 속에서 내가 밖으로 나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간질'이라는 병명은 부모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자신들이 마주했던 부모님과 동생의 장애는 평생의 짐이었고, 도망치지 못했던 징글징글한 팔자였다.
그러니 부모님이 나의 아픔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의 병은 부모님에게 수치였고,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패의 결과물이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절대 밖에 알리지 못하도록 가족들에게 얘기했다. 나의 병명은 이 집안의 금기어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갔다.
부모님의 사랑은 나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두는 방식이었다.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수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따로 있었다.
부모님이 나를 감추는 동안, 나도 서서히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나조차도 조금씩 잊어버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행동이 그럴 수 있고 사랑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독 힘든 날이 있었다.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정신을 잃어가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서로 엉켜 귓전을 맴돌았다.
의식을 놓기 전에도 나는 생각했다.
빨리 정신을 잃어서 고통이 없어졌으면, 이제 그만 끝났으면.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 나를 되돌린 것은 삶에 대한 거창한 의지가 아니었다. 끝까지 내 청각을 두드렸던 가족들의 울먹임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사람들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처음처럼 많은 약을 먹으며 지낸다. 그러나 지금은 소화 장애 정도만 남아 있고, 약의 부작용도 많이 줄었다.
매일 열 알 넘는 약을 먹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감사한 일이다.
스무 알이 열 알이 되기까지,
시간이 가장 큰 몫을 했다.
덕분에 요즘은 밥 먹으라고 채근하는 남편에게,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르다고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생겼다.
별것 아닌 농담이지만, 나에게는 꽤 오래 걸린 여유다.
주치의 선생님이 늘 하셨던 말이 있다.
"이 병은 약만 잘 챙겨 먹으면 돼."
그 말을 부모님에게 들었더라면.
아니, 내가 진작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냥 불편한 것, 조심해야 할 것이 많은 것이라고 받아들였더라면.
조금 덜 오래 헤맸을지도 모른다.
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고약한 친구처럼 들이닥쳐 평생을 함께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기도 한다.
아픈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거창한 운명도 아니다.
그냥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 이해해 보려 한다.
부모님도, 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했다는 것을.
그 방식이 늘 아름다울 수는 없다는 것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 안에는 배려가 있고, 감사가 있고, 때로는 조용한 의지가 담겨 있다.
할아버지는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굿판을 벌이셨고, 어머니는 징글징글하다 말하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셨고, 나는 매일 발작을 하면서도 다시 약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절망 속에서 소소한 희망을 찾아내서 품고, 견딘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