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사랑은 모두 보여주지 않는다

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by윤소희

샤넬이 만든 공간이라고 해서 화려할 거라 기대했다. 검은색과 금색, 대리석과 조명, 럭셔리 브랜드 특유의 긴장감 같은 것.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상하이당대미술관 안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Espace Gabrielle Chanel). 그 공간 중심에 있는 도서관은 놀랄 만큼 담백했다. 연한 나무색 서가와 흰 기둥, 천장을 따라 길게 이어진 조명. 화려함보다 눈에 들어온 건 공간 전체에 배어 있는 절제였다.


IMG_4947.JPG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입구에 들어선 후 공간이 인도하는 대로 바카라과 서가 사이를 걸었다. 그곳의 서가는 단순히 바카라을 꽂아 두기 위한 가구가 아니었다. 서가가 벽이고, 난간이며, 계단이었다. 아래층에서 시작한 바카라장이 위층으로 이어지고, 위층 복도는 다시 다른 서가와 맞닿았다. 마치 바카라과 서가가 도서관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서가는 시선을 막지 않았다. 한 층 끝에서 다른 층이 보였고, 몇 걸음 옮길 때마다 바카라장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었다.


IMG_4956.jpg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도서관에 들어올 때 소지품을 모두 맡겨야 했는데, 읽다 가져온 바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른 도서관처럼 자리를 잡고 가져온 바카라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어쩔 수 없이 공간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빈손으로 서가 사이를 걷는 일은 생각보다 낯설었다. 뭔가를 찾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바카라 사이를 천천히 걷다가 때때로 멈추고, 바카라 표지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 도서관은 이래야 한다는 내 선입견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서가에는 바카라만큼이나 여백이 많았다. 어떤 칸에는 바카라 한 권만 놓여 있고, 어떤 칸은 아예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아직 정리가 덜 된 줄 알았다. 하지만 서가를 따라 천천히 걷다 보니, 그 빈칸마저 이 공간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카라보다 여백이 먼저 보이는 도서관. 그 틈 덕분에 바카라 한 권 한 권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고, 바카라 한 권 앞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었다.


IMG_4948.JPG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이곳은 약 5만 권의 예술·건축·디자인·문화 관련 장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가운데 일부만 공간에 펼쳐 놓았다는 것을. 모두 보여 주기보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남겨 둘지 오래 고민한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코코 샤넬 역시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는 사람이었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여성의 몸을 조이던 옷에서 자유롭게 했다. 아름다움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지 아는 데 있다.


서가 사이를 걸으며 사이좋은 연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들 역시 서로에게 모든 걸 보여주지는 않는다. 상대를 속이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오래 기다릴 줄 알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을 남겨 두며, 끝내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은 부분을 존중한다.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남길지 아는 감각은 예술과 디자인뿐 아니라 사랑에도 필요한 기술인지 모른다.


IMG_4955.jpg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


도서관을 나오니, 커다란 통유리 너머로 늦은 오후의 빛이 길게 흘러들었다. 그 빛은 바카라보다 먼저 비워 둔 서가를 비추고 있었다.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기에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것도 있다.


IMG_4971.JPG상하이 에스파스 가브리엘 샤넬이 있는 상해당대미술관


상하이의 사랑법 40.png윤소희 작가

바카라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바카라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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