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판롱루 (蟠龙路)
“빨리 가자.”
“잠깐만.”
고요한 새벽, 낮춘 목소리로 두어 번 실랑이하다 나는 어느 순간 안 되겠다 싶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나 먼저 간다.”
아파트 복도 끝으로 보이는 하늘부터 심상치 않았다. 온통 붉은빛이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준비운동도 잊은 채 하늘 사진부터 찍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태풍경보는 여전히 발효 중이었고, 바람은 제법 거셌다. 태풍 덕분인지 아침놀은 평소보다 깊고 풍성한 색을 품고 있었다. 붉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늘 달리던 길을 따라 뛰었다.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느라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뒤에서 나를 따라잡아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워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빠르게 달렸다. 하늘에 붉은빛은 남아 있었지만, 내가 막 문을 나섰을 때에 비하면 이미 절반쯤 옅어진 뒤였다.
내가 집에서 나온 시각은 4시 48분. 남편을 기다리다 평소보다 5분 늦었다. 남편이 나를 따라온 것도 그로부터 5분쯤 뒤였다. 그걸 못 기다리고 혼자 나가느냐고 할 법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5분은 꽤 긴 시간이었다. 평생 몇 번 만나지 못할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
그날 일출 예정 시각은 4시 59분.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집을 나선 바로 그 순간이 아침놀이 가장 깊은 색을 품던 골드 모먼트였다. 세상이 밤에서 낮으로 건너가는 짧고도 찬란한 경계. 물론 그 시각에 나간다고 언제나 황홀한 하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빛은 태풍이 남긴 선물에 가까웠다. 밤새 세상을 흔들던 바람이 먼지를 걷어냈고, 흩어진 구름이 첫 햇빛을 붙들어 붉은 아침을 빚어냈다.
물론 모든 태풍이 아름다운 아침을 남기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빛은 오래 흔들린 뒤의 하늘에서만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그 빛은 겨우 5분 동안 절반이나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짧은 시간 사이,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발걸음을 맞추려고 속도를 늦추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삶 대부분이 그런 기다림 위에 세워진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문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5분은 너무 길다.
바카라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바카라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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