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너무 긴 5분

상하이 판롱루 (蟠龙路)

by윤소희

“빨리 가자.”

“잠깐만.”


고요한 새벽, 낮춘 목소리로 두어 번 실랑이하다 나는 어느 순간 안 되겠다 싶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나 먼저 간다.”


아파트 복도 끝으로 보이는 하늘부터 심상치 않았다. 온통 붉은빛이었다.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준비운동도 잊은 채 하늘 사진부터 찍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태풍경보는 여전히 발효 중이었고, 바람은 제법 거셌다. 태풍 덕분인지 아침놀은 평소보다 깊고 풍성한 색을 품고 있었다. 붉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깔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판롱루 3.JPG상하이 판롱루 (蟠龙路)


늘 달리던 길을 따라 뛰었다.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느라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뒤에서 나를 따라잡아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불러 세워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빠르게 달렸다. 하늘에 붉은빛은 남아 있었지만, 내가 막 문을 나섰을 때에 비하면 이미 절반쯤 옅어진 뒤였다.


내가 집에서 나온 시각은 4시 48분. 남편을 기다리다 평소보다 5분 늦었다. 남편이 나를 따라온 것도 그로부터 5분쯤 뒤였다. 그걸 못 기다리고 혼자 나가느냐고 할 법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날 5분은 꽤 긴 시간이었다. 평생 몇 번 만나지 못할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사라지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


그날 일출 예정 시각은 4시 59분. 남편을 기다리다 못해 집을 나선 바로 그 순간이 아침놀이 가장 깊은 색을 품던 골드 모먼트였다. 세상이 밤에서 낮으로 건너가는 짧고도 찬란한 경계. 물론 그 시각에 나간다고 언제나 황홀한 하늘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날의 빛은 태풍이 남긴 선물에 가까웠다. 밤새 세상을 흔들던 바람이 먼지를 걷어냈고, 흩어진 구름이 첫 햇빛을 붙들어 붉은 아침을 빚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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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판롱루 (蟠龙路)


물론 모든 태풍이 아름다운 아침을 남기는 건 아니다. 다만 어떤 빛은 오래 흔들린 뒤의 하늘에서만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 그 빛은 겨우 5분 동안 절반이나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긴 짧은 시간 사이, 두 사람이 보는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발걸음을 맞추려고 속도를 늦추고, 준비되지 않은 마음을 재촉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가는 삶 대부분이 그런 기다림 위에 세워진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문 앞에 멈춰 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먼저 문을 열고 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


어떤 5분은 너무 길다.


판롱루 1.JPG상하이 판롱루 (蟠龙路)




13872 2.JPG윤소희 작가

바카라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바카라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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