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그 남자 만난다면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낼 거야?

by달dal


16. 아가씨, 3개월 후에 결국 그 남자 만난다면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낼 거야?


[달리기 31일째, 부동산 사장님과 다시 만났다]



어제 영화에서 만났던 두 명의 헬렌과 나의 동지 88년생 진호 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아침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 말이다. 내 인생의 영화에 나라는 주인공이 기승전결 스토리에 맞춰 그때그때 만나야 하는 출연자들을 하나씩 만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끓인 국화차가 너무 뜨거워 냉동실에서 큼지막한 얼음을 하나 꺼내 머그잔에 퐁당하고 던졌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뜨거운 국화차 안에서 조각 얼음 하나가 빠르게 녹아가면서 마시기 딱 알맞은 온도가 되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다정 부동산 사장님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맞다. 내 영화에 등장인물이 또 있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나는 안부 인사를 건네며 그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은 계약한 서류에 추가 사인과 특약에 대해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부동산에 올 수 있냐고 했고, 오늘 오후에 잠깐 들리겠다고 했다. 오랜만에 들은 사장님 목소리는 여전히 조금은 냉랭했지만 그 내용은 역시나 계약에 문제가 없게 꼼꼼히 챙겨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그 사이 고운 국화꽃이 활짝 핀 국화차를 호로록 마셨다.




그날 오후, 나는 박카스 한 박스를 사 들고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무실 전화기로 누군가와 바삐 통화를 하시던 사장님은 나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여전히 바빠 보였다. 그리고 사장님은 이내 전화를 끊고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와서 인사를 했다.




"아가씨 오래간만이네. 오늘 평일인데 출근 안 했나 봐? 이건 뭐야?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이런 걸 왜 사 왔어. 앞으로는 안 사 와도 돼. 이건 고맙게 먹을게."




"아 네, 사장님 덕분에 좋은 집도 구했고요. 한 달 동안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 집 괜찮지? 여기 오피스텔이 지은 지가 오래돼서 낡은 호실이 많은데 그 집은 깨끗이 수리한 귀한 집이라고 했잖아. 일단 여기 서류부터 봐봐."


서류에 수정할 부분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듣고 사인을 했다. 그리고 내가 들고 간 박카스를 사장님과 한 병씩 나눠 마셨다. 그리고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사장님, 저 사실은 공무원 아니에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직업이 뭔데?"



"제가 공기업 7년 정도 다니다가 퇴사하고, 지금은 잠시 쉬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 부동산 처음 왔을 때 그 말이 이상하게 안 나오더라고요.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어요."



"그래? 그런데 그게 뭐가 죄송해?"


"네?"



"아니 그게 뭐가 죄송하냐고. 아가씨가 나한테 중개비를 안 줬어? 아니면 그 집 월세를 밀리고 있어? 죄송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뭐가 죄송하냐는 말이야. 내 말은."



이상했다. 보통 어른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평생 온라인 게임을 왜 그만뒀냐고 묻거나 그래서 지금은 무엇을 하냐고 궁금해하는데 사장님은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죄송한 게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었다.



"제가 거짓말했잖아요."



"나쁜 의도로 한 말이 아니면 괜찮아. 그리고 아가씨가 공무원이든 아니든 나한테는 똑같이 내 손님인데 죄송할 게 뭐 있나? 그거 웃기네."



뭐가 죄송하냐는 말에 조금 멍해진 나는 오후에 햇볕이 따뜻하게 들고 있는 부동산 안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엇을 하든 똑같은 나라는 말이 따뜻했다.


"아가씨 남자친구는 있어?"


"아니요. 올해 초에 헤어졌어요."


"그래? 그럼 결혼 생각은 없고?"


"좋은 사람이 있으면 해야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사장님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사장님을 바라봤다.



"아이고 웃겨라. 그런 사람이 왜 없어? 아가씨 오늘 진짜 웃기네. 우리 부동산 옆에 냉면집 봤어? 그 가게 앞에 손님들이 항상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잖아. 맛집이라서."



"네. 봤어요. 추운 날씨에도 냉면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어요."



"그러니까 말이야. 사람들이 일단 대기 번호표 받으면 절대 어디 안 가고 기다리잖아."



"네, 그렇죠. 내 차례 오면 냉면 먹을 수 있으니까요."




"아가씨, 만나서 결혼하고 싶은 남자 3개월 후에 만난다면 오늘 하루 뭐 하면서 보내고 싶어?"



"네?"




"아니, 식당에 가서 주문하고 그 음식이 안 나올까 봐 걱정 한적 있어? 맛집이라 시간이 더 걸려도 결국 내 음식은 내 앞에 나오잖아. 심지어 저기 냉면집은 자리에 앉지도 못하는데 대기표 종이 한 장만 받아도 사람들이 안심하고 기다리잖아. 그게 그거랑 똑같다고. 어차피 아가씨가 원하는 남자는 나타난다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건 냉면이 나오는 거랑 같은 이치니까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상태라면 아가씨는 오늘 뭘 하며 보내겠냐는 거야."




순간 지나다니며 봤던 부동산 옆 냉면집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그 앞에 길게 대기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렇게 기다려서 냉면이 나올까 의심하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대답했다.



"가장 저다운 모습으로 예전처럼 하루하루 열심히 그리고 밝게 살아갈 것 같아요."



"그래? 그거 좋네. 그럼 어여 가. 가서 그렇게 오늘 하루를 보내. 배고프면 냉면 한 그릇 먹고 가던가 하고."




라는 말과 함께 사장님은 또다시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30년 넘게 하다 보니까 이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들어오는 손님 눈썹 모양만 봐도 어떻겠다 하는 게 이제는 보여. 그날 아가씨가 부동산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지쳐 보이더라고. 예쁘고 착한 아가씨가 왜 저렇게 지쳐 있을까 싶더라고. 원래 그런 게 있어. 더 잘 찾아주고 잘 해주고 싶은 손님이 있어. 이유는 나도 몰라. 무슨 일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가씨 힘내. 아가씨가 원래 살던 대로 살어. 그러다 보면 냉면 나오는 것처럼 또 그 남자도 눈앞에 와 있을 거야. 진짜여. 내 말 한번 믿어봐. 손해 볼 것도 없잖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사장님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부동산을 빠르게 나왔다. 왜냐하면, 사장님이 담담하게 쏟아내듯 말한 위로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위로 같지 않은 위로는 그날 아침 내가 마신 국화차의 딱 적당한 그 온도와 매우 닮아 있었다. 너무 뜨겁지도 또 많이 식지도 않은 그런 온도의 말이었다. 그리고 집에 와 생각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등장인물들이 쏟아지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들은 분명 날 좋은 방향으로 데려다주는 건 확실한 것 같아. 고마운 출연자들이군.'




그리고 사장님이 던진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3개월 후에 그 남자를 만난다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거야?'



그렇다면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뭘까. 3개월 후에 그 사람이 온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그를 맞이하고 싶을까. 나는 또 다시 다이어리를 꺼내 적기 시작했다.



3개월 후, 나는 비 오는 날 함께 우비 입고 달려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 내 무지개가 방 천장에 갇혀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래서 지금은 맑은 하늘에 떴어?"라고 물어줄 사람. 구겨진 종이 이야기를 듣고 "지금은 예쁘게 펴졌네"라고 말해줄 사람. 우리가 살아온 정서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 함께 천천히 걸어갈 수 있는 사람.




적고 보니 그렇게 거창한 조건이 아니었다. 그저 나를 이해하고, 나의 속도에 맞춰 함께 걸어줄 사람. 그 사람이 3개월 후에 온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하며 지낼까?'



매일 아침 요가를 하며 내 몸과 마음을 현재와 연결할 거야. 매일 저녁 양재천을 달리며 나를 지킬 거야. 나에게 상을 주는 일을 계속할 거야.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들을 찾아서 하나씩 다시 시작할 거야. 그리고 그 일들을 멋지게 성공시킬 거야.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이야기하며 살 거야. 구겨졌던 나를 천천히 펴가며 살 거야.


그렇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살 거야.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도록 할 거야.




냉면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은 온다. 냉면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그때 나는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그를 맞이할 것이다.




[달리기 31일째]

냉장고 문을 열었다. 30개의 달걀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31일째. 딱 한 판.


'2판만 더 채우면 100일이구나.'

그리고 냉면도 나와 있겠지.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나는 삶은 달걀 하나를 꺼내 먹고,양재천으로 향했다.


오늘은 특별히 가벼웠다. 사장님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아가씨가 원래 살던 대로 살어.'


나는 원래 어떻게 살았더라? 열심히, 밝게, 치열하게, 꿈을 꾸는 것이 행복하게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살면 되는 거였다.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3개월 후에 그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이 양재천을 걸을지도 모른다. 아니, 달릴지도 모른다.



어제 넘어졌던 그 돌이 보였다. 그 돌을 들어 길 옆 가로 옮기고, 그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진호 씨가 앉아 있던 벤치를 지날 때 살짝 눈 인사를 했다. 아무도 없었지만.


'저주받은 88과 비운의 89. 우리 모두 힘내자.'











"조금 우스운 질문이지만 당신의 영화는 지금 어느 부분을 촬영 중인가요?



나는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모든 등장인물들이 정말 다 사람이었을까? 그 많은 출연자들 중에 어느 한 순간, 가여운 나를 위로하려 잠시 신이 머물다 간 순간은 없었을까?



언젠가 좋아하는 영화 감독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영화 한 편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100여 명은 훨씬 넘는 스태프들이 함께 해야 한다고요.

거기에 모든 출연 배우들까지 헤아리면 몇백 명은 충분히 넘는다고도 하더라고요.



영화도 인생도 수많은 출연자들이 주인공을 스쳐가잖아요.

그리고 스쳐간 인물들은 대부분 크게든 작게든 주인공에게 무언가를 꼭 남기고요.



나는 언제부턴가 나를 스쳐간 그 배우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배우들이 또 어찌나 기대가 되는지요.



당신은 어때요?



오늘은 어떤 출연자를 만나 그들은 당신에게 어떤 것들을 남기고 갔나요?

오늘따라 당신의 영화와 출연진들이 정말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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