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양
벌만 주던 나에게 상을 주기로
[달리기 24일째, 우비를 입고 엉엉 울며 달린 날 이후로 체중이 빠지기 시작했다. 약해진 체력이 회복되는 것이 작지만 느껴졌다. 그 무렵부터 달리는 일이 좋았다. 그리고 점점 더 이 길 위를 달리는 내 자신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하루의 한 시간 그리고 일주일의 하루를 나를 위해 쓰기로 했다. 어떤 것들로 나에게 상을 줄까 태어나 처음으로생각했다.]
2주 가까이 내리던 가을비가 그치던 아침이었다. 요가 수업을 마치고, 오랜만에 체중계에 올라갔다. 왜냐하면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집에는 체중계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체중이 줄어 있었다. 그것도 5kg이나. 한 달 가까이 달렸다지만 3주 만에 이렇게 체중이 많이 빠져도 되는 건가 싶었다.
집에 돌아와서 냉장고와 부엌 선반을 열었다. 냉장고엔 생수, 닭가슴살, 물만 타면 되는 쉐이크, 흰 우유가 전부였고, 선반도 사정은 비슷했다. 절반 정도 남은 시리얼과 짜장 라면 한 봉지 그리고 커피 원두 한 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않고, 달리기만 했으니 살이 그렇게 빠지지. 이러다간 100일 못 채우고 쓰러지겠네.'
냉장고에 들어 있던 흰 우유의 유통기한이 2주나 지났다는 걸 발견하고 그 우유를 싱크대에 따라 버리면서 생각했다. 상한 우유가 하수구로 흘러내렸다.
나도 이 우유처럼 나를 방치해 둔 건 아닐까.
'이젠 나에게 상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벌만 줬잖아. 잘한 건 칭찬 안 해주고, 늘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자바카라과 벌만 줬으니 이젠 날 위한 상을 주어도 될 것 같은데. 뭐가 있을까? 내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것들.'
일단 우유팩을 깨끗이 씻어 물이 잘 마르도록 거꾸로 세워두고 바카라상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상이 뭐가 있을지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도무지 펜이 잘 움직이지가 않았다. 빈 종이 위에 펜 끝만 맴돌았다.
'나는 뭘 좋아했더라? 내가 그냥 아무 생각 안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뭐가 있었더라? 남 신경 안 쓰고,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내 취향이 무엇이었더라? 일단 지금은 날 건강하게 먹게해주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
나에게 상을 주려는 어색한 일을 하려니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펜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천천히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났다. 종이는 여전히 하얗고 펜 끝만 맴돌았다. 그런데 하나를 적으니 둘이 생각났다. 둘을 적으니 셋이, 넷이, 다섯이 줄줄이 따라왔다.
나는 바카라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산바카라하는 것, 예쁜 카페에 가서 맛있는 라떼를 마시는 것, 향기 좋은 제품으로 샤워하는 것, 영어 공부 하는 것, 멍 때리는 것, 봄이 오면 꽃 구경을 하는 것, 엄마랑 수다 떠는 것,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밤새 이야기 하는 것, 추운 겨울에는 좋아하는 만두전골 집에 가는 것, 여름에는 단골 냉면집에 가는 것, 오래된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 누군가를 돕는 것, 깨끗이 청소하고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것,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사는 것, 내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쓰는 것, 스트레스 받으면 눈물 나게 매운 떡볶이를 먹는 것, 비 오는 날 낮잠 자는 것, 집에서 싼 김밥을 먹는 것, 연극을 보러 가는 것, 좋은 것을 발견하면 주변 사람에게 소개해 주는 것, 연락이 뜸했던 오랜 친구들에게 먼저 안부를 전해보는 것, 무심코 들어간 식당이 맛있는 것, 길거리의 신호등에 한 번도 걸리지 않는 것…
30분쯤 지났을까. 처음엔 더디던 펜 끝이 점점 빨라졌다..
종이의 여백이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을 까만 펜 자국이 빼곡한 종이를 보고 알았다.
'나도 나를 이렇게나 모른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할까. 나는 100가지가 겨우 안 되는 것들 중에 지금 내가 나에게 해줄 수 있는 5가지 일만 추렸다. 100개 중에 지금 당장, 돈 많이 안 들고,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골랐다. 더불어, 나에겐 지금 충분한 에너지가 있지도 않았으니까. 특히 나를 먹이고, 나를 향기롭게 하고, 누군가와 연결되는 것들로. 그리고 그것들을 나에게 기꺼이 상으로 내려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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