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비가 오면 우비를 입었다. 그리고 달렸다.

서공양

by달dal

비가 오면 우비를 입었다. 그리고 달렸다.

[달리기 20일째, 늦은 가을비가 요란하게 하루 종일 내렸다. 그날 비가 오니 우비를 입고 달렸는데, 비 오는 소리에 세상이 조금 시끄러운 틈을 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그날 빗방울과 함께 흘려보냈다.]



그해 여름은 유독 가뭄 관련 뉴스가 많이 들렸었다. 여름 내 혹독하던 그 갈증을 달래주기 위함이었을까? 며칠 동안 계속 늦가을비가 요란하게 내렸다. 전국에서 며칠 내내 비가 내리고 있다는 뉴스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가을 한번 요란하게 오네. 나에게 무엇을 주려고 가을은 이렇게나 요란하고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 걸까?'


어제 자기 전에 주문한 하얀색 우비가 문밖에 도착해 있었다. 우비는 총 10개 들이 1세트였다. 비닐 포장을 뜯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달리는 동안 비 오는 날이 열흘은 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니, 사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날씨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우비라도 준비해 두는 것이었다. 우비 10개를 신발장 문 한켠에 가지런히 넣어 정리했다. 나중에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 안 사실이지만, 그 우비는 3개가 남았다. 그때 내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유독 요란한 가을비를 뿌리던 그 가을이 내 바람을 들어준 것 같기도.


어제는 저녁 6시에 잠깐 비가 멈춰 다행히 양재천을 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후가 되니 유독 빗줄기가 강해졌다. 창밖을 보니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람에 우산이 뒤집힐까 봐 두 손으로 꽉 잡고 급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5시가 넘어 나갈 준비를 하며 바라본 창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오니까 나가지 말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 좋은 핑계였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나 싶고. 하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도 들었다. 100일의 시간이 하루라도 늦게 끝나는 것이 싫었다.

그리고 나가서 달리지 않는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결정하고 또한 행동한 적이 있던가? 늘 여러 가지 요소를 생각하고 또 계획하며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장단점을 따지고, 리스크를 계산하고, 최악의 경우까지 고려했었는데 말야. 지금은 그냥 하기로 한 걸 하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렇게 약속한 저녁 6시가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현관으로 가 새로 산 러닝화를 신었다. 발목 보호대와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신발장에서 하얀 우비를 하나 꺼냈다. 비닐 소리가 바스락거렸다. 우비를 펼쳐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거울을 보니 우스꽝스러웠다. 그리고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투사인 양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누가 보면 날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걸 안 하면 내가 진짜 미칠 것 같아서 하는 거지.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은 그런 게 안 중요해. 나한테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오늘도 달리는 것.'



[달리기 20일째]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로비를 나서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우비가 바람에 펄럭였다. 양재천까지 걸어가는 3분이 평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역시 양재천 물은 많이 불어 있었다. 평소보다 물살이 빨랐고, 물빛도 탁했다. 그래서 물이 넘칠 수 있는 지역을 피해서 달리기 코스를 정했다. 바람도 불고 빗줄기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달리는 사람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런 날씨에 누가 달리겠어. 집에 그냥 들어갈까 생각이 다시 올라오려고 해서 발을 얼른 내디뎠다.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 양재천 위에 그 날은 나만 있었다. 평소에는 산바카라하는 사람들, 데이트 하는 사람들, 교복 입고 학원 가는 학생들 그리고 나처럼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길 위를 나 혼자 달렸다. 그것도 그다지 튼튼하지도 않은 허술한 일회용 흰색 우비를 입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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