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비행기 사고로 사막에 불시착한 6년 전까지 서로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대도 없이 혼자서 외롭게 지내 왔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2021, 자화상, P14
이 바카라의 화자는 6살 때 생애 첫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고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뱀'이었다. 참 굉장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을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아는 지식으로 판단하며 성공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라고 충고한다.
그 이후 비행기 조종술을 배우고도 자신의 첫 번째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는지 시험해 본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이 하는 대답은 이 화자의 마음 문을 닫게 한다.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고 소화시키고 있는 보아 뱀'이 아니라 '모자'라고 하는 사람들만 만났으니까 말이다.
자신의 내면을 이해받지 못하는 경험은 마음 문을 서서히 닫게 만든다. 나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상대방이 내 마음을 들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해 버리는 경험은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대학교 시절, 믿었던 친구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나는 그저 내 고민과 생각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내 이야기를 자신의 가치관으로 해석했고, 결국 나를 속물적인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전해졌고, 나는 내가 하지도 않은 의도로 평가받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상처는 친구의 뒷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상대의 해석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깊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한 번 더 망설이게 되었고, 내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그림을 보여줄 때마다 사람들은 화자의 세계를 자신의 기준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도 설명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가 처음으로 보아 뱀을 알아보았을 때, 그것은 오랫동안 닫혀 있던 한 사람의 마음을 다시 열어 준 사건이었을 것이다.
지난주에 들렀던 미술관에서 본 글귀가 있다. 정서영 작가의 <전망대>라는 전시물에 대한 설명글이다. 그 설명글에 의하면 작가는 친구가 보낸 엽서 속 손톱 크기의 전망대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자신만의 전망대를 구현했다. 작가가 구현한 전망대는 일반적인 전망대의 기능과 상징으로 벗어난 낯선 형태로 나타났다. 작가는 "본래의 미분화된 상태로부터 각각 명명되어 분화한 사물은 지극히도 부분적인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이를 통해 언어가 사물을 온전히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특정 의미만을 고정시켜 그 이면에 존재하는 수많은 가능성과 감각을 지워버릴 수도 있음을 경계한다고 쓰여 있었다.
우리는 주변의 사람들과 현상들을 끊임없이 정의하려고 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적 범주 안에 넣고 익숙한 이름을 붙이고, 때로는 진단하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이해한 것 같은 안도감이 생긴다. 낯설고 복잡했던 대상이 하나의 단어로 정리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 존재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꽃을 '목련'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목련나무가 지내왔던 인내의 시간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우리의 잣대로 분류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눈물과 사랑, 상실과 희망까지 이해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우리가 붙인 이름보다, 우리가 단정 지은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으며, 예상하지 못하는 가능성을 간직한 존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능력이 아니라, 그 이름 너머를 바라보는 눈이다. 어린 왕자가 보아 뱀 속의 코끼리를 보았던 것처럼, 보이는 모습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를 알아보려는 마음이다. 사람은 이해받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