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뒤흔들던, 나의 환승역.

우리가 만난 환승역

by연하일휘

뺨 위를 스치듯 흘러내리는 땀방울 하나를 옷깃으로 훔쳐낸다. 경직된 몸에 더해진 작은 떨림이 답답하게 갇힌 공기와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노트 하나에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새겨놓지만, 글자들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제멋대로 종이 위를 유영하듯, 흘러가는 단어들이 낯설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한참 고개만 끄덕이다 보니, 목 뒤가 뻐근해진다. 이직에 성공했다. 약 13년간 일해온 학원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중이다.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 기간제 교사 제의가 들어왔다. 교육청 인력풀에 이력서를 올려놓기는 했지만, 학교 근무 이력이 전혀 없었다. 근무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고민 없이 튀어나왔다. 몇 번 시간강사에 도전했지만, 돌아오던 부정적인 답들에 의기소침해져 있던 중이었다. 학원강사로서의 경력만 지닌, 무경력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다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문제 하나가 마음 위에 얹혔다. 면접을 보고 난 뒤, 약 2주 뒤에 바로 출근이다. 학원에서 그 시간 동안 새로운 선생님을 구하고, 인수인계를 하기에는 너무 빠듯하다. 짧은 고민 끝에 학원 원장님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이직 제안이 들어왔다고,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갈 예정이라고. 사실상 그만두겠다는 통보였다. 면접에서 떨어진다면, 영락없는 백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면접을 보고, 3시간 뒤 바로 연락이 왔다. 준비해야 할 서류들을 읊어주며 '축하한다'는 말이 뒤를 이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다. 잘할 수 있을까. 면접을 보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들려오던 소리 위로 문장 하나를 억지로 뒤덮는다. 나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나는 긴 시간을 근무하던 학원을 떠나 한 학교의 기간제 담임 선생님이 되었다.


정신없는 시간들에 한숨을 내뱉을 새가 없다. 낯선 업무들 앞에서 노트 한 권이 금세 너덜거린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보지만, 해야 할 일들에 다시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학습지들을 넘겨본다. 피곤함에 지끈거리는 머리와 깊숙한 통증이 느껴지는 눈을 번갈아 문지르며 손을 바삐 움직인다. 툭- 문밖으로 둔탁한 소음 하나가 전해진 후, 택배 알림 문자가 그 뒤를 이었다. 긴 시간 동안 선생님과 글벗들이 함께 고심하며 엮어낸 바카라이 도착했다. 해야 할 일들 앞에서 결국 바카라을 먼저 펼쳐본다.



'우리가 만난 환승역'.



어렴풋이 내가 썼던 글들을 떠올린다. 내 글이 바카라으로 엮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쑥스러워 괜히 다른 페이지만 넘기며, 다른 글들을 눈에 담는다. 모두의 환승을 천천히 훑어보며, 손끝에 걸리는 몇몇 문장들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에 조용히 빠져든다. 그러다 익숙한 글자들이 엮인 페이지 위에서 손을 멈춘다. 그 문장을 써 내려갔을 때의 내 모습이 그려진다. 한숨처럼 새어 나온 웃음이 낯설다. 응, 그랬구나. 지금 나는 그 길목이구나.


글을 쓰던 그때, 글귀들이 얽히지 않아 애를 썼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이 낯선 까닭이었다. 너무 긴 시간 동안 웅크려있었다. 익숙한 '학원'이라는 공간에 13년간 안주하는 것을 선택한 탓에, '환승'에 올라탔던 나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힘겨웠다. 나의 글을 다시 손끝으로 훑는다. 준아. 선생님은 항상 너를 응원해. 한 글자씩 엮어낸, 그 문장이 공간을 울렸었다. 첫 내 삶의 환승을 이끌어낸, 그때의 말이 남긴 울림은 조용히 내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 뒤로부터 이대로는 안된다는, 마음속 외침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몸을 뒤흔드는 그 울림이 안온함을 하나씩 어그러트렸다.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오지 않는 연락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때때로 반복된 고배에 붉어진 눈시울을 지그시 눌러댔지만, 울음 섞인 한숨을 남몰래 숨겼지만. 숨어있던 울림이 만들어낸 떨림을 견디는 일보다는 쉬웠다.


글귀 위에서 손을 멈춘 채 머릿속으로 글자들을 엮어본다. 다시 이 글을 써 내려간다면, 더 투명하게 그때의 마음을 그려낼 수 있을 테다. 두 번째 환승역에 도착한 지금의 나라면.


첫 번째 환승이 나의 두 번째 환승을 이끌어냈다. 그때의 시간이 사각거리는 종이 위에 반듯하게 내려앉아 있다. 누군가의 두려움에 작은 울림을 주기를 바라며. 언젠가는 이 두 번째 환승도 글귀가 되어 내려앉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글자들을 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