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쓰는 걸 좋아할까

by내민해
그렇다고 안나가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안나는 세상에 관심이 많고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새로운 아침이 밝아오고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바다와 들판에 노을이 붉게 물드는 풍경을 좋아한다. 도시의 야외 카페와 영화관과 분수대와 놀이공원, 강가의 불꽃놀이와 철교 위를 지나가는 밤 기차 또한 안나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아이들이 뛰어가고 친구들이 반갑게 만나고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연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은 안나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든다.

<시간의 감촉> 은희경



요즘 나의 글쓰기 루틴이 달라졌다. '이 모든 게 회사 때문이야'라고 투덜거리지 않기로 했다. 아마추어 같은 소리는 넣어두고, 회사 덕분이라고 말하면 나의 마음도, 의지도, 자율성도 좀 더 존중받는 느낌이 드니까 낙관하기로 했다. 아니, 달관이려나. 뭐 어쨌든 환경설정은 다시 하면 되니까. 그 덕에 나는 다시 버스쟁이가 됐다. 한강을 건널 때만 숨을 몰아쉬듯 풍경을 구경하던 지하철쟁이의 시절은 가고, 푸릇푸릇 나무들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버스를 타던 시절로 되돌아갔다. 다만 그 시간이 꽤 길다는 게 문제랄까. 정시 퇴근을 모토로 살아가던 내게 직바카라은 이토록 무서운 것이렸다! 정시 퇴근이 어려워지자 택한 건 늦은 출근이었다. 탄력근무제라 가능한 일이었고, 일찍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면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한 부분이다. 여기서 문제는 출근이야 내 마음대로 늦게 해도 되지만 일찍 퇴근을 하려 하면 사람들이 놓아주질 않는다는 거다. 내가 아무리 칼퇴를 계획해도 일과 사람이 나를 놓아주질 않으니, 그냥 늦게 가는 걸 택한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아니, 결론이다.


아침마다 버스여행(여행이 되었다고 한다)을 하면서 나는 바카라을 읽고 글을 쓴다. 바카라이야 그렇다 치고, 글을? 여담이지만 나는 휴대폰을 고를 때도 오타감을 꽤나 중요시 여기는 편이다. 다른 기능은 없어도 버벅거림이 심한 건 용서가 안 된다. 그 이유가 휴대폰으로도 많은 글을 쓰기 때문인데(사실 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도 많은 글을 쓴다), 노트북과 휴대폰의 글쓰기 분량이 못해도 아마 반반은 될 거다. 최근에는 휴대폰으로 더 많이 썼으니 6 대 4가 되었을지도. 버스에 앉아 읽고 쓰는데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곤 하는데, 요즘 그 시간이 너무 기다려진다. 사실 원래도 밤의 글쓰기보다 아침의 글쓰기를 더 좋아하긴 했다. 밤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 정신이 너무 맑아져 글을 다 쓰고 잠자리에 누워도 각성 상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아침이나 낮에 짬짬이 글을 쓰고, 밤에는 바카라을 읽다 잠드는 게 루틴이었다. 근데 이제는 아침에 글 쓰는 시간이 꽤나 길어져 마음껏 활자의 세계로 풍덩 빠질 수 있게 된 거다. 읽기 또한 마찬가지다. 구간마다 나름의 정체기는 있었지만 쓰기와 읽기의 비중이 달라졌을 뿐 둘 모두를 놓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떤 시기에는 입을 꾹 닫고 하염없이 읽기만 했고(올해 읽은 바카라만 벌써 100권이 넘어가고 있...), 또 어떤 시기에는 마음에 품고 있던 온갖 상념들을 휘갈기듯 쓰기만 했다. 골고루 애정을 나눴고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맞췄다.


얼마 전에는 작은 공모전에서 당선 소식을 선물처럼 받기도 했다. 소설이 아닌 수필이었고, 메일함에 도착한 축하 글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시상식이 평일이라 참석할 수 없다는 답장을 하는 게 못내 아쉬웠다. 나의 글이 어딘가에 실리고 전시회도 열린다는 사실이 아직은 실감 나지 않지만 무엇보다 기뻤던, 아니 안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녹슬지 않았다는 감각. 이건 나의 글쓰기가 적어도 엉망은 아니라는 검증 같은 건데, 글을 쓰다가도 가끔은 내 글이 지나치게 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게 아니라 너무 막글 같아서 머뭇거리게 된달까. 소설을 쓰면서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망연한 생각들. 이렇게 해도 괜찮나 싶은 마음.


31일이 마감이었던 공모전에 제출한 소설도 그랬다. 제목도 내용도 다 그냥 내 이야기 같아서. 결말을 맺으면서도 자꾸만 문장을 덜어내고 싶었다. 이 말도 자르고 저 말도 자르고, 분량에 미달할지라도 지나치게 사적인 것보다는 낫겠다 싶었던 거다. 결말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질질 끌다가 아슬아슬하게 제출하긴 했지만.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라고 외쳐대는 나니까 괜찮아, 괜찮아, 라고. 스스로를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소설을 보내러 오랜만에 방문했던 우체국에서는 재미있는 일도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내 글씨체 때문이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 겸연쩍지만 나는 글씨체가 꽤 괜찮은 편이다. 덕분에 글씨에 대한 칭찬은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는데, 우체국에서도 겉봉투에 있는 내 글씨를 보고 직원분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시선이 집중됐다는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는데, 겉봉투에 빨간 글씨로 적혀있는 '단편소설'이라는 단어가 문제였다. 왜 출판사들은 겉봉투에 응모부문을 적어 제출하라는 건지. 적힌 글씨와 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 눈길이 정말이지 너무 너무 너무! 부담스러웠다. 마치 '네가 소설을 쓴다고?'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글씨를 칭찬하던 직원분 중 한 분은 머쓱할 나를 걱정하셨던 건지 자신의 아내도 소설을 하나 구상하고 있다고 하셨다(토닥토닥, 괜찮아요, 청년. 마음껏 써요). 하지만 그 옆에 계셨던 다른 직원분이 꽤나 준엄한 말투로 요즘은 AI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게 의미가 없다는 종말론(적어도 나에게는) 같은 말씀을 건네주셨다. 너무 감사해서 웃음이 날 지경... 이었지만 웃지는 않았다. 그런데 AI와 문학의 위기를 진지하게 걱정해주셨던 그분이 다시 내 글씨를 가리키며 "이런 걸 뭐라 그러지? 그 왜 있잖아. 캐리커처?"

그때까지만 해도 무심한 얼굴로 그분들의 대화를 방관하던 나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 대화에 동참하고 말았다.

"캘리그라피요?"

"아, 그래. 그거요. 캘리그라피. 글씨가 꼭 그거 같아요."

캐리커처와 캘리그라피의 공통점은 키읔과 '리'가 들어간다는 것 외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가뿐히 접고, 그냥 웃어버렸다. 소설 공모전 하나가 이렇게 또 웃음을 주는구나 싶어서다. 그분들 덕분에 들어갈 때 무거웠던 마음과 달리, 산뜻하게 우체국을 나설 수 있었다. 거창한 걸 기대할 만큼 내 글은 위대하지 않다. 아니, 지나치게 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건 아니다. 나에게 울림이 있고, 어떤 이에게도 그 울림이 닿을 수 있다면 그 또한 감사한 일 아닌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갈망이 중요한 거지. 이 공모전은 결과가 발표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하는 과정에서 찾아온 고뇌와 글쓰기의 즐거움이면 충분했다.


근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은 골고루 찾아오는 걸까. 수상 소식을 들었던 날, 간발의 차이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달갑지 않은 번호였고, 이어서 도착한 메시지에서는 다급함마저 느껴졌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여직원 휴게실로 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중개사님."

건너편에서는 중개사님의 살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문자 내용 확인하셨냐며. 나는 그렇다고 답했고, 이런 일이 처음이라 자꾸만 말이 꼬였다. 좋은 집주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안도했던 건 내 착각이었을까. 집주인이 바뀔 것 같다는 중개사님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그렇게 내 일상이 달라지고 있다. 조만간 사는 곳이 다시 바뀔 것 같아 걱정이 하나 더 늘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한번 해봤으니까 이번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인생이라는 게 변수의 연속 아니던가. 특히나 올해는 회사도 집도 관계도 무엇 하나 나를 얌전히 두지를 않는구나.


매달 한 번씩 열리는 독서모임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이 모임을 운영한 지가 벌써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지난 모임에서는 <천문학자의 쓸모없음에 관하여>라는 바카라을 중심으로 무쓸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유쾌하던지. 바카라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문장("무익하지만 무해하다")처럼 그날의 대화는 (겉으로 보기에) 무용한 것들이 많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들 저마다의 무한한 우주가 있고, 그런 우주를 마음껏 상상하며 뻗어가다 엉뚱발랄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괴짜 같은 이야기들이 나는 왜 이리 재미있는지. 나이가 들어도 잃고 싶지 않은 감각이 동심과 호기심인데, 그 중심에 쓸모없음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날은, 나만의 버스를 소개하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뻔뻔).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서로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휴지를 건네는 다정한 손길이 있었고, 작고 소소하지만 자신만 아는 멋스러움을 알아본 이가 건넨 따뜻한 칭찬에 모두가 웃음 짓기도 했다. 각자의 경로가 달라져도 이 모임의 결만큼은 부디 흔들리지 않기를. 그 마음을 소중히 품고서 집으로 향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삶이라는 건 단 한순간도 쉬웠던 적이 없다. 하나를 해결하면 그다음이 있고, 계속해서 다음이 찾아왔다.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더 큰 무언가가 떠밀려 들어와 나를 넘어트릴 때도 많았다. 예고 없이 날아온 둔탁한 마찰에 허우적대며 방황하기를 여러 번, 그럼에도 아직은 이 땅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살아가는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 실패를 동력 삼아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저벅저벅 찰박찰박 느릿느릿 걸어가며 하루를 정갈하게 다듬고, 글을 쓰고, 바카라을 읽는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무용한 것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해지는 과정. 이 모든 과정의 기록이 결국은 글쓰기로 수렴하는 게 아닐까. 문장에 마침표를 꼭꼭 찍을 때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또 다음 문장, 그 다음 문장을 상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나는 과연 누구에게 가장 솔직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다름 아닌 소설이었다.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나를 지울 수 없었던, 지극히 나여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게 소설 쓰기란 그런 것이었고 그래서 놓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주제와 결이 다른 두 소설 속 주인공인 민혜와 서인도 결국은 돌고 돌아 또 하나의 나였으니까. 나의 이야기는 앞으로 얼마나, 어디까지 더 뻗어갈 수 있을까. 언제까지 좋아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