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내는 대신 슬픔에 익숙한 사람들. 찡그리기보다 고요히 무표정해지는 사람들. 지호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다. 아주 약하게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만 사랑했다. 누워서 흘리는 눈물은 귓속에 고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슬픔이 거기에 고이는 걸 아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시간만큼만 그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 속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걸 아는 채로. 더 사랑하면 자기연민이 되므로 그보다 오래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시간만큼만 자신을 가여워하고, 그 밖의 시간에는 자신을 가여워하지 않는다. 비슷한 무리를 지어 안도감을 얻고 서로를 치켜세우지 않는다. 무리에 속하면 포근함에 계속 거기 있고 싶어진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품에 있는 것은 아주 잠깐. 다시 혼자로 되돌아오는 것을 바란다. 슬퍼도 그쪽을 택하기로 한다. 혼자이기를 선택한 지호가 언젠가 품어졌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텅 빈 마음을 가진 채로. 그것이 지호가 생각하는 균형.
<텅 빈 마음 가진 채로> 김화진
정확한 나이는 떠오르지 않지만 20대 끝자락 언저리쯤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연말을 기념하며 와인바를 찾았던 밤의 기억. 을지로에 위치한 낡고 오래된 가게였는데, 조도가 낮은 붉은 계열의 조명과 몽환적인 음악이 잔잔히 흐르던 공간이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와인바가 만석이라 급하게 대안으로 찾은 그곳에서 우리는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날짜와 위치는 흐릿하지만 한 장면만큼은 유독 생생하게 남아있는데, 다름 아닌 그날의 즉흥공연이다. 친구들과 연말을 기념해 각자의 무탈함을 축하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가던 찰나였다. 갑자기 가게의 조명이 꺼지더니 무대의 조명만이 환하게 빛났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옆에 있던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이게 아까 말했던 공연이구나."
"오잉? 공연? 나는 못 들었는데, 그게 무슨..."이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연은 시작됐다. 어떠한 말도, 음악도 없이 그저 한 남자의 기괴한 몸짓만으로만 말이다. 살면서 그런 공연은 처음 봤다. 저런 걸 행위예술이라고 하는 건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저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아우라가 있었다. 심지어 알코올이 들어가 정신까지 몽롱해진 덕에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기묘한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친구들의 넋 나간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는 듯싶었다. 자신만의 세계에 심취해 기과하다 싶을 만큼 몸을 자유자재로 비틀고 멈추기를 반복하던 그. 날렵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절제된 몸짓과 선. 그에게 몸이란 예술을 위한 하나의 도구나 재료에 불과해보였다. 말 그대로 몸뚱어리. 그날의 경험은 파편처럼 내 기억 속 한 공간에 각인되고 말았다.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금 꺼내든 건 얼마 전에 다녀온 한 공연 때문이다. 그때 느낀 감정을 이번 공연에서 비슷하게 느껴버린 거다. 대학로의 소극장에서 하는 유명하지 않은 공연이었고, 어쩌다 알음알음 알게 되어 텀블벅으로 후원까지 마친 터였다. 무엇보다 나를 끌어당긴 건 이번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연기한 배우가 추구하는 가치였는데, 그녀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물성의 무대를 그리고 싶어 했다. 이제는 배우라는 직업조차 AI로 대체될 거라는 사실에 벌벌 떨면서 시작된 본능적인 몸부림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그 두려움이 하나의 작은 공이 되어 첫 연출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AI의 놀라운 기술력(만)을 추앙하며 허겁지겁 섭렵하기 바쁜 이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등. 그저 달고 맛있으면 장땡이다 싶어 소화가 되고 있는지, 건강한 음식이 맞긴 한 건지,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등을 돌아볼 여력조차 없는 게걸스러운 식문화처럼, 디지털 인간들을 향한 하나의 일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달팽이라는 이름도 좋았다. 시대에 동떨어진 우직함과 느릿한 움직임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공연의 형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이걸 공연이라 칭할 수 있을까 싶은 기묘한 행위들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공연 소개에 낯섦의 감각과 호불호가 있을 거라는 방지턱을 세운 점 정도겠다.
입장할 때 손전등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공연 중간중간 아무 때나 켜고 싶을 때 무대를 향해 켜도 된다는 말에 얼렁뚱땅 고개는 끄덕였지만 극중에는 단 한 번도 켜보지 못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연습 삼아 한번 켜봤다가 생각보다 밝은 빛에 놀라 호들갑스럽게 off 버튼을 눌렀던 게 그나마 다였다(은근 소심쟁이라). 농담이고, 사실은 공연에 집중하느라 손전등을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과거에 느낀 몽환적인 감각을 다시 한번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면 화면이 전환되는 것처럼, 무대가 또 다른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단조로운 대사임에도 압도적인 힘이 느껴졌다. 그들은 공연 내내 땀을 흘렸고 나는 이따금씩 눈물을 훔쳤다. 땀으로 흥건해진 티셔츠를 입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들의 모습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가 울림처럼 내 귓가를 맴돌았다.
지하 극장에서 올라와 빛이 쏟아지는 길거리로 나오자 잠시 잊었던 현실 세계가 나를 확 끌어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공연의 여운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누군가는 곁에 있는 소중한 것에 더욱 애정을 담는다. 나는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일까. 감상의 여운을 잃고 싶지 않아 대학로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걷다가 집으로 향했다. 20대의 나였다면 이 공연을 보고 어떤 생각을 품었을지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저항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감으로 쉬지 않고 달려가는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자주 숨이 차곤 했는데, 이번 공연을 보면서 다시금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선물로 받은 작은 필름 조각은 바카라장에서 눈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오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도 배웠다. 지금보다 더 세월이 지나도,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작은 공간에서는 이번에 본 공연의 형태 같은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응원하기도 했다. 공연을 만드는 내내 세상을 향해 까분다는 느낌이 들어 여러 번 낙담했다는 그녀의 고백이 무색하지 않도록, 나 역시 지금의 모습을 잃거나 변질되지 않고, 작고 정성스러운 것 하나에 여전히 감동받는 사람으로 남아있는 게 우선이겠지만 말이다.
한 가지 아쉬웠던 건 향이었다. 지하 극장으로 내려가면서 코끝에 서서히 닿았던 향. 그 향이 정말 좋았다. 나무? 흙? 비 오는 날 느껴지는 촉촉한 물기의 향 같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서 살짝 여쭤볼까 하다 마음을 접었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부터 입주민 중 누군가가 집안에서 담배를 피우는지 지독한 담배 냄새가 환풍구를 통해 자꾸만 넘어왔다. 저녁에 방송이 여러 번 나왔음에도 이렇다 할 변화가 없어 냄새에 한껏 예민해진 탓인지, 이번 공연을 통해 좋은 향이 만들어내는 안온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금 느꼈다. 그래서 내 결론은 공연에서 만난 향을 직접 찾아보자는 것(아니면 공방에서 직접 만들어도 되고). 과거에 담배를 피웠던 적이 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었고, 지금의 나는 그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인간으로 되돌아갔다. 원래도 흡연 자체를 싫어했는데(이제는 지인 중에도 흡연자가 없다), 피울 당시에는 그 냄새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 있게 말해보자면 흡연자의 매너는 충분히 갖출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욕먹지 않고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흡연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그건 기호의 차이니까 알아서들 하면 될 일이고) 흡연하면서 매너를 지키지 않는 모습이 문제라는 것이다. 적어도 흡연자일 적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그 정도의 바카라임감은 가져야 무언가를 누릴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