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대화 중에 함께 했던 지난 이야기를 미담처럼 다시 꺼내지 않는다. 추억을 재생하는 레퍼토리를 즐기지 않는다. 익히 아는 오래된 상처를 꺼내어 내밀한 관계임을 새삼 확인하지도 않는다. 대신, 다음 달에 무얼 할지, 내년에 무얼 할지, 새롭게 꾸고 있는 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묻는다.
그녀는 바카라임지던 것들을 계속 바카라임지며 살고 있고, 새로이 바카라임지고 싶은 것들을 언급한다. 바카라임지는 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들을 무심하게 꺼내놓는 게 전부다. 그녀의 대화법은 그렇게나 암울했던 그녀가 그 누구보다 빛나 보였던 비결 중 하나였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김소연
펼쳐들 때마다 문장을 빼곡히 수집하고 싶은 작가가 있다. 바로 김소연 시인이다.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뚜렷하지만 나는 시인으로서의 김소연보다 산문가로서의 김소연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사실 그녀의 시집은 너무 난해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그녀의 산문집을 읽을 때마다 타이핑 필사를 이어가는 시간은 따뜻함을 넘어 평온함을 준다. 이번 글에서 수집한 문장도 그랬다. '초록서림'에서 만난 <나를 뺀 세상의 전부>를 읽으며 뭉근한 마음이 진하게 퍼져갔다.
지난 주말에는 오랜만에 옛 동네를 다녀왔다. 사는 내내 지긋지긋해하며 치를 떨었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내 안식처가 되어준 서점 덕분이다. 작고 아늑한 공간, 서가 곳곳에 사장님의 정성 가득한 손길이 느껴지는 '시행과 착오'는 고유한 주황빛을 반짝이며 여전히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지금 사는 곳과 위치상 끝에서 끝이 되어버린 탓에 자주 방문하지는 못하지만 간간이 서점 소식을 살피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반가운 모임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신청 버튼을 눌렀다. 작년에 영화 모임에 참석한 이후로 두 번째 참석이었다. 인기가 많은 모임이었던지 모집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감'이라는 글자가 생겨났다. 다행이다 싶어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모임을 기다렸다. 이번에 참석하게 된 모임은 '체호프 4대 장막 낭독 워크숍'인데, 안톤 체호프의 4대 장막극인 <바냐 삼촌>, <갈매기>, <세 자매>, <벚꽃 동산>을 4회에 걸쳐 함께 낭독하는 일정이었다. 회차별로 신청이 가능했고, 나는 첫 모임인 <바냐 삼촌>만 신청했다. 바냐 삼촌, 바냐 아저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바카라은 전에 온라인 낭독모임에서 한 차례 읽었던 적이 있어 한결 친숙한 작품이기도 했고, 최근에 봤던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의 중심이 되었던 작품이라 유난히 애틋했기 때문이었다. 온라인으로 낭독모임에 참여했을 때('시행과 착오'와는 무관한 모임이었다)는 체호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며 아름아름 짚어가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모임은 달랐다.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은 갖춘 상태라 조금 더 폭 넓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모임 시작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한 작품을 온전히 낭독하는 모임이라 그런지 꽤 이른 시간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집도 멀어져 서둘러 집을 나서야했다.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고 늦지 않게 동네에 도착했고, 익숙한 골목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곳을 떠난 지 무려 1년이 지났건만 바로 어제 걸었던 것처럼 생생했다. 추억과 낭만에 젖기는커녕 나는 이 길이 여전히 싫었다.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오직 서점만을 목표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싫음의 감각이라 건 내게 이토록 강렬하다. 한번 싫어진 건 시간이 지나도 미화되지 않는다는 게 내 고질적인 사고였고, 그 기질이 변하지 않았음을 다시금 실감한 시간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지나간 사람은 그저 지나간 사람일 뿐이지 후회나 미련, 추억을 곱씹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다. 그렇게 좋았다면 관계가 이어졌겠지. 글이 자꾸 옆으로 새는데, 늦지 않게 바카라방에 도착했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있을 거라 자신했건만 웬걸, 착각이었다. 두 분이나 먼저 와 계셨고, 이번 모임을 진행하시는 '희곡탐미소'의 소장님은 일찍부터 분주하게 모임을 준비하고 계셨다. 소장님이 직접 번역하고 윤색한 <바냐 삼촌>이 자리마다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바카라과 색을 나란히 맞춘 인물 소개 용지까지 정성스레 꽂혀있었다.
오전에 갑작스럽게 모임을 취소한 분이 있어 그 빈자리를 메꾸고자 얼떨결에 사장님도 합류하게 됐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왜 꼭 당일날 불참하는 사람들(+지각자)은 어딜 가나 한 명씩은 있는 건지 살짝 한숨이 나기도 했다. 나의 울퉁불퉁한 마음과는 별개로 모임은 유쾌하게 시작됐다. 소장님은 낭독모임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몇 가지 소개해주셨는데,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잘한다는 건 자신을 뽐내는데 집중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등장인물이 여성이라고 해서 혹은 남성이라고 해서 굳이 그들의 톤을 흉내 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만의 스타일과 속도로 읽으면 된다는 것이다. 그 말에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서점에 도착한 순서대로 역할을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최대한 비중이 없는 배역을 골랐다. 낭독도 좋지만 극에 몰입하며 다른 분들의 음성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번 모임에는 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계신 분들도 있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듣는 내내 속으로 얼마나 감탄했던지. 여기가 낭독모임인지 실제 공연장인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발성과 딕션 자체가 달랐다.
체호프의 4대 장막 중에서도 특히나 <바냐 삼촌>은 가장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실제 대화를 방불케 하는 사실주의에 선악의 구분이 없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다만 그 대화라는 게 말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 자신의 말만 떠들어대고 있다(이 모습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현실을 제대로 풍자하고 있는 게 아닌지?). 심지어 체호프는 자신의 작품을 코미디라 표현했다는데, 읽다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본인이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블랙코미디처럼 우스꽝스럽게 잘 나타내고 있으니 말이다. 후반부에 가서야 극적인 화해(?)에 성공하는데, 나는 왜 그 모습이 억지스럽게 느껴졌을까. 알맹이는 비어있고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느낌? 관계의 매듭을 애써 꽉, 아주 꽉 동여매는 느낌? 어쩌면 이 모습 또한 우리네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일상에 파고든 서로에 대한 잔잔한 증오랄까. 그렇다고 관계를 삭둑 도려내기에는 하도 미미해 차마 표현은 못 하고, 그저 꾸역꾸역 삼키고 마는 것처럼 말이다. 선과 악이 불분명한 인물들의 모습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는데,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바냐만 봐도 그렇다. '삼촌'이나 '아저씨' 등으로 번역된 제목에 속아(?) 따뜻하거나 다정한 모습을 기대하면 큰코다친다. 다만 다른 건 몰라도 그의 억울한 심정만큼은 깊이 공감했다.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소는 누가 키우냐!
(한참을 쓰다가 갑자기 든 생각인데, 이 글은 대체 어디까지 길어질까)
모임은 3시간(하다 보니 3시간을 훌쩍 넘어버리긴 했지만) 동안 진행됐고, 함께 완독했다는 게 왠지 뿌듯했다. 낭독을 마치고는 순번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기도 했는데, 의견이 다 다르다는 점도 신기했다. 어떤 분은 인물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격식을 차린다고, 또 어떤 분은 너무 노골적이라고. 각자가 살아온 인생에 빗대어 느낀 바가 다르다는 건 언제나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데 그날도 그랬다. 모두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고, 억울함도 있고(웃음), 그 안에서도 기쁨이라는 게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는데,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삶이라는 게 참 아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삶과 아름다움. 이 조합에 대해 최근에 새롭게 느낀 점을 끝으로, 이 글을 슬슬 마무리 지어볼까 하는데(아닐지도 모르고). 사실 나에게 (죽음과는 대조적으로) 산다는 건, 상수가 아니라서. 어릴 때부터 늘 이 질문이 꼬리표처럼 머릿속에 떠다녔다.
"왜 살아야 할까?"
얼마 전 천선란 작가의 라디오를 통해 그녀도 같은 고민을 하며 자라왔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가만히 잘 듣다가 그 대목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에게 던졌던 그 질문은, 이유를 찾기 위함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질문이었다. 살 이유가 없다면 죽겠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외침이기도 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알려줘, 죽고 싶지 않아, 와 같은. 라디오를 다 듣고, 내 삶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다 어떤 거창한 이유보다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이 다시금 깊어지는 걸 느꼈다. 이번에 다녀온 낭독모임도 그랬고, 활자의 세계 안에서 마음껏 유영하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다. '시행과 착오'처럼 좋아하는 서점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것도.
최근에 방문했던 동네서점은 '청소년 바카라 사줄게 프로젝트'라는 걸 하던데, 이 프로젝트도 정말 좋아보였다. 어른들이 서점에 후원금을 보내면 청소년들이 그 서점에 방문해 무료로 바카라을 고르는 건데, 청주에 있는 '바카라방, 앤’이라는 서점의 단골손님이 매달 3권씩 후원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부모님 없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님 눈치를 보지 않고 스스로 바카라을 고르는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는 게 이유였다.
"바카라방지기 이지영씨는 "요즘 학생들이 바카라을 읽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어요. 직접 와서 고르고, 실패해보는 경험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정한 규칙이 바로 보호자 없이 ‘혼자’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그 이유에 대해 “부모님이 함께 오면 아이들이 눈치를 봐요. 결국 스스로 고르지 못하죠.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고른 바카라이라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마음에도 깊이 공감했다. 이번에 내가 방문한 서점도 이 프로젝트에 동참하고 있는 곳 중 하나였는데, 기쁜 마음으로 후원을 했고, 이런 선순환은 이곳저곳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담이지만 바카라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으로 기부하는 기관들이 몇 곳 있는데, 바카라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바카라을 위한 기부도 하나쯤 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더랬다. 이번에 만난 '초록서림'이 그 시작이지 않을까.
바쁜 숨을 몰아쉬던 회사의 일도 차근차근 정리되고 있다(일단 표면적으로는). 몇 년에 걸쳐 가지런히 잘 다듬어두었던 일상의 궤도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 자주 이탈하곤 하지만 이 또한 삶의 묘미가 아닐까. 요즘은 이른 새벽에 종종 산바카라을 나간다. 집 근처에 공원이 많아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는 감사한 마음을 품고서 말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아예 없는데, 그래서 더 좋다. 고요함을 넘어 적막한 그 분위기가 지독하게 내 취향이다.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 걷다가 뛰다가 심지어 춤도 추기 시작했다(잘 춘다는 말은 안 했음).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에 취해 춤을 춘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라고 속으로 외치지만 현실은. 관절을 꺾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러니 새벽이어야 한다. 아무도 없기에 가능한 나만의 놀이가 또 하나 생긴 셈. 친밀해진 관계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뒤틀린 줄 알았던 관계의 오랜 매듭도 얼마 전에 풀어버렸다(이렇게 간단했다니). 모든 게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