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짓

by내민해
<글짓, 쓰는 예술>은 서울시립미술관의 2026년 기관 의제인 '창작'을 탐구하는 전시이다.

미술계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는 '작가'라는 단어는 예술 작품을 독창적으로 짓거나 표현한다는 창작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한다. 이번 전시는 작가를 글 쓰는 사람, 즉 문학가로 여기는 일반적인 인식에 착안하여 '글쓰기'를 통해 미술 창작을 이해하며, 미술가가 생산하는 글에 주목한다. 전시의 제목인 '글짓'은 여러 형태의 움직임을 갖게 된 글의 몸짓을 의미하는 것으로, 작가의 몸을 통과하여 전시 공간에 펼쳐지는 글의 생명력을 은유한다.

《글짓, 쓰는 예술》



지독한 F형 인간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은 아침이었다. 감정의 여파가 잔잔은커녕 요동치는 걸 느끼면서 하루를 느릿하게 시작했다.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의 경계를 지긋이 뭉개면서 말이다. 얼마 전에 다녀온 전시에 대해 쓰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계속 짬이 나지 않았다. 작품 그 자체보다는 활자가 더 가득한 전시였다. 북서울미술관은 어릴 때,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에 있던 미술관이라 유독 친근해서 주기적으로 찾는 편인데, 이번 전시도 그러다 우연히 발견했다. 첫 번째로 방문했던 날 이건 한 번의 관람으로 만족할 전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총 두 번을 찾았다. <글짓, 쓰는 예술>이라는 제목처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전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10명의 작가들 중 이민선, 차혜림, 조소희, 안규철의 작품이 좋았다. 여러 작품을 감상하면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구원'이었다. 이번 전시뿐만이 아니었다. 요즘 들어 부쩍, 읽고 있는 소설에서도, 누군가가 집필 중인 소설의 초고에서도, 이 전시에서도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만났다. 자꾸만 발견되는 이 단어 앞에서 자주 무너지고 울컥했다. 구원은 스스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굳은 심지를 꺾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안규철 작가의 <타인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라는 제목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기도 했다.



@ 서울시립미술관
폴란드의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에 등장하는 "Only others save us."라는 문장을 크리스탈 구슬 13,000여 개를 꿰어 표현했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가 있던 2014년에 이 작품을 처음 만들었다. 아물지 않은 상처이자, 타인의 고통을 보며 흘리는 눈물을 반짝이는 빛기둥으로 표현해 슬픔에 빠진 관객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했다. 10년 후 다시 만든 이 유리구슬 발은 작가에게 "나와 타인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자, 우리가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구원의 개념과는 결이 달랐지만 심지는 닮아있는 듯했다. 과연 구원은 스스로 얻는 것일까, 타인으로 인해서'만'(이 작품의 이름에서 '만'이라는 보조사가 유독 눈에 거슬렸다) 가능한 것일까. 스스로는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일까. 누군가가 내민 손을 맞잡아야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나로서도 그 손을 잡기 위한 힘이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다. 안규철 작가의 이어지는 작품도 좋았는데, 제목이 입에 잘 붙지 않았다.




@ 서울시립미술관
들어오세요, 벗어 놓으세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동명의 시를 공간으로 확장한 설치 작업이다. 이 짧은 시구절이 씌어있는 전시장 벽과 그 앞의 허공에 띄워져 있는 몇 개의 나무 의자가 관람객을 물리적 공간 너머의 세계로 초대한다.
의자들이 바닥에서 들어 올려져 있다.
이 의자들은 '벗어놓으라(내려놓으라)'는
문장과 대비되며,
당신의 슬픔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되새기게 한다.
내려놓으면 가벼워질 것이니,
바닥에 붙들려 있던 의자가 공중에 떠오르는 것처럼
당신도 떠오를 수 있기를.

안규철 <한 잔 재스민차의 초대>


전시실에 들어선 순간 정면으로 마주한, 허공에 매달려 있는 세 개의 의자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작품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자살'이었다. 그 압도적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칠게 숨을 삼키고 작품을 한동안 바라보다 설명을 읽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슬픔을 여기 내려놓으라는 작가의 메시지가 울림처럼 맴돌았고, 이번 전시를 다시 찾아야겠다 다짐한 결정적인 작품이기도 했다.




@ 서울시립미술관
말로 정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단상이 과연 존재할까?

이 작품은 '정확한 말'이라는 허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상황들을 모은 낭독극이다. 극 중 두 배우와 작가가 주고받은 애매하고 장황한 대화는,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불가능하다는 자바카라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진다. 낭독극은 정해진 시간에 공연되며,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무대, 소품, 영상, 대본이 전시장에 놓여 관객이 극을 상상하도록 한다.

이민선 <정확한 말> 낭독극


이민선 작가의 낭독극을 보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고,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같은 단어를 이토록 다르게 해석하다니! 자꾸만 엇갈리는 두 목소리가 현실고증 같았다. 씁쓸하면서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말장난이 어처구니없었지만 수긍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헤드셋을 끼고 멍하니 앉아있으면 한도 끝도 없이 들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전시실을 걸으면서 나에게 쓴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토해내고 싶은 감정의 빛깔이 글로 쏟아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런 글이 괜찮은 걸까 싶기도 하고. 글을 세밀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희열 앞에서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삶과 시간의 선을 긋고, 짜는 명상적 행위로써 예술적 의미를 지닌다."는 조소희 작가의 말이 묵직하게 와닿기도 했다. 마치 뜨개질을 하는 것처럼.


작품 그 자체보다 작품을 구상하면서 단상처럼 쏟아낸, 작가의 글들이 더 좋았던 전시.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이미지나 영상보다는 활자가 좋고, 활자를 읽으며 마음 깊숙이 글자를 새기는 과정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차예림 작가는 '글쓰기는 언제나 실패와 머뭇거림 사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작업 노트에 쓴 문장들, 쓰다 지운 메모, 읽히지 못하고 남겨진 글들은 다른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나며, 작품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고. 디지털 슬롯에서 오류로 간주되는 머뭇거림과 공백, 일상의 미세한 장면들, 얼룩, 호흡, 흐름의 기울기 등 비효율의 구조 속에는 우리가 놓쳤을지도 모를 뒷모습의 공간이 있고, 속도로 환원되는 세계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감각의 리듬을 찾아가는 길이며, 그 과정이 예술가의 글쓰기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그녀의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며 뭉근한 위로를 얻었다. 삶의 여백을 계속해서 채워가고, 음미하는 과정. 그렇다. 쓴다는 건 단순하지 않다. 그걸 다시 한번 느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어쩌면 이게 내 구원이고, 믿음일지도 모르겠다는 걸.


끝으로 서론에서 살짝 언급한 지독한 F형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고 싶다. 최근에 알게 된 하나는, 나는 정서적인 대화를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는 점이다. 내면의 대화라고 해야 할까. 이건 나눠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법한 대화의 결인데, 보통 바카라을 매개로 대화를 나눌 때 이 깊이가 가능하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오늘 무엇을 먹을까'부터 시작해서 도구적이고 일차원적인 내용만 가득한 대화는 왠지 모르게 공허하다. 오래된 관계도 이 대화만 가능하다면 그 관계 자체에 근본적인 물음표가 생기곤 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마음과 마음이 닿아있지 않는 듯한 묘한 비틀림 말이다. 일명 감정의 교류가 부재한 상태. 내가 바라는 대화의 결을 이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낭만이려나. 머리가 복잡해지지만 이 복잡함을 글로 차분히 정리할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글쓰기의 소중함을 느낀다.

그래, 이렇게 또 쓰면서 나를 한 뼘 더 알아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