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숙소 안은 작은 빨래방처럼 변해 있었다. 의자 등받이, 침대 난간, 문고리까지, 빨래를 걸칠 수 있고 바람이 통해 물기를 날려 보낼 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우리 가족의 팬티가 매달려 있었다.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에 오면 이 도시를 지켜준다는 드래곤을 보러 간다고들 하던데, 그날 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바라본 것은 드래곤이 아니라 팬티였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슬로베니아 바로 전 여행지, 크로아티아에서부터였다. 크로아티아 숙소에 세탁기가 있어서 '한번 빨래를 돌려볼까?' 싶기도 했지만, 빨래를 널어 둘 곳도 마땅치 않아 보였고, 3박을 연이어 머무는 류블랴나 숙소에도 세탁기가 있다고 했으니 거기서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빨래는 한번 시작하면 종류별로 분류하고, 세탁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널고, 개어서 가방에 넣어야 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영 내키지 않았다.
여행 6일 차가 되자 하루하루 벗어 놓은 옷들과 양말, 속옷이 빨래 가방에 차곡차곡 쌓이더니 어느새 가방 세 개 분량으로 불어나 있었다. 처음에 캐리어에 담아 갔던 옷이 빨래 가방으로 옮겨지면서, 캐리어는 텅텅 비어 가고 빨래 가방은 꽉꽉 채워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잔뜩 몸집이 커진 빨래 가방을 트렁크에 욱여넣고 슬로베니아에 도착했다.
숙소 앞에는 커다란 직사각형 철제 주차장 문이 있었고, 그 앞에 호스트가 서 있었다. 호스트는 철문을 열어 안쪽에 차를 세우면 된다고 했고, 주차장을 잠그는 법부터 대문을 열고 숙소 건물의 현관을 지나 우리 방으로 들어가는 길까지 차례차례 자세히 설명해 줬다. 이 익숙한 순서. 파리에서 한 번 겪어 봤던 그 번거로운 문들을 여기서도 또 통과해야 했다. 아이들도 이번엔 좀 요령이 생겼는지 차에서 내릴 때 뭘 더 가져갈 게 없는지 미리 둘러보기도 했다. 호스트는 깨알같이 길 건너에 자기가 운영하고 있다는 마트도 알려줬다.
우리는 짐을 대충 내려놓고 곧장 류블랴나 성으로 올라갔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짙은 갈색 지붕들이 이어진 도시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크로아티아와 비슷한 느낌이면서도 뭔가 도시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성의 꼭대기에 나부끼는 국기를 보니 우리가 다른 나라로 넘어왔다는 게 조금 실감이 났다.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에 이곳에도 테이크아웃 전문 한국 식당이 있다는 걸 미리 체크해 뒀는데, 다행히 류블랴나 성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포장해 숙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전화를 걸어 "할로" 대신 "여보세요?"를 조심스레 말해 봤다. 그러자 상대편에서 "네,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음이 가뿐해졌다. 타국에서 한국어로 김밥을 주문하다니. 근데 아쉽게도 김밥은 매진이었고, 우리는 아쉬운 대로 불고기덮밥과 제육덮밥을 포장해 왔다.
크로아티아에서 제대로 된 한식을 못 먹어서인지 포장 용기를 열고 뽀얀 쌀밥의 자태를 보자 다들 신이 났다. 식탁에 둘러앉아 싹싹 긁어먹고 난 남편이 한마디 했다. "역시 밥을 먹으니 밥 먹은 것 같네."
에어컨은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TV에서는 영어 방송 채널이 나왔다. 이미 성까지 다녀온 데다 배까지 부르고 나니 다시 밖으로 나갈 마음이 쉽게 생기지 않았다. 드래곤 다리도 시내 산바카라도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다음 날에는 포스토이나 동굴에 다녀왔고, 그다음 날에는 보힌 호수에서 하루를 보냈다. 아침부터 물에 들어가 놀다가 숙소로 돌아오니 젖은 수영복과 수건이 또 빨랫감에 합류했다. 이대로라면 집으로 갈 때 캐리어에 빨래를 꽉꽉 눌러 담아 가야 할 판이었다. 이제는 정말 더 미룰 수 없겠다 싶어서 세탁기부터 찾아 나섰다.
예약할 때도 세탁기가 있다고 적혀 있었고 에어비앤비 페이지를 다시 열어 봐도 분명 그렇게 되어 있는데, 도저히 세탁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나 싶어 집 안을 한 바퀴 돌았고, 내가 못 찾는 줄 알고 건물 입구며 다른 곳까지 이곳저곳 다 돌아다녀 봤지만 거기에도 없었다.
결국 호스트에게 세탁기 위치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자 답장이 왔다. 첫날 얘기했던 자기 마트 옆에 코인세탁소가 있으니 그곳을 이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거 코인세탁소도 자기가 운영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빨랫감을 들고 건물을 내려가 길을 건너서 빨래를 돌리고 다시 들고 올 수 있을까 하는 합리적인 판단에 돌입했다.
더 큰 문제는 건조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옷은 대부분 면 소재였고, 집에서도 옷이 줄어들까 봐 건조기는 거의 쓰지 않는 편인데, 낯선 건조기에 넣었다가 다 쪼그라들어서 입을 옷이 당장 없어진다면 곤란했다. 그렇다고 이렇게나 잘 보이는 저 빨래들을 못 본 척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다.
결국 가족들을 다 이끌고 집 근처 dm에 가서 빨래 비누를 하나 사 왔다. 비누를 사기 전까지 진짜 손빨래를 할까 말까 고민이 많았지만, 여름철이고 속옷들이 쌓여 있다 보니 청결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았고, 차라리 그냥 해치워 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세면대 앞에 서서 한 장 한 장 비누칠을 하고 욕조에 철썩 던져 넣은 다음 남편과 아이들에게 샤워할 때 한 번씩 발로 밟으라고 했다. 나 혼자만 이 재미난 빨래를 할 순 없지.
그렇게 옛날 방식으로 때를 빼고, 헹굼을 마친 빨래의 물기를 짜고 나니 이번에는 건조대가 보이지 않았다. 세탁기가 없으니 건조대가 있을 리가. 물기 묻은 손을 닦고 나와서 숙소를 한 바퀴 돌아봤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빨래를 널었을 때 잘 마를 만한 곳들을 체크한 뒤, 하나하나 널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기억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 탄생했다. 의자에도 팬티가 있고 침대에도 팬티가 있고 걸칠 수 있는 곳에는 모두 팬티가 널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들 팬티가 알록달록해서 그리 크게 풍경을 해치지 않았다는 것 정도? 처음에는 아이들도 팬티가 온 사방에 있다며 깔깔깔 웃어댔지만, 이내 적응해서 자기가 앉을 의자의 팬티를 슬쩍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미루지 말고 빨래할 걸..
빨래를 어디에 널어야 제일 잘 마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