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사람의 에피소드

그래도 되는 날

by정언

우울이 몸을 적시던 무렵, 나는 매일 외출을 계획했다.


집을 나선다. 환승을 피해 멀리 있는 역까지 걷는다. 지하철을 타고 피부과 병원에 간다. 몇 정거장을 걷는다. 운전면허시험장에서 면허증 갱신을 한다. 지하철을 타고 큰 시장에 가서 점심을 먹고 셔츠에 달 단추를 산다. 시내를 지나 걸어서 집으로 온다.


피부과 의사는 그만 와도 된다고 했다. 병원을 나서며 해야 할 일이 줄은 것에 머뭇거렸다.


운전면허시험장에 도착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잠시 기다리다 사진을 찍었다. 사진 기사가 립스틱을 덜어주며 바르는 게 좋겠다고 했다. 건강검진 기록을 확인하는 창구에 섰다. 신분증이 없었다. 직원이 나를 보고 헛웃음을 웃었다.

주민등록번호를 대고 겨우 확인증을 손에 쥐었다. 신분증 없이 신분증 갱신하러 온 사람이었다. 창구에서는 분실로 처리하겠다고 했다.


큰 시장에 도착해서 떡볶이를 먹었다. 셔츠 단추 열 개를 사고는 시장을 돌아봤다. 다육을 구경하다 리톱스 화분을 샀다. 단팥빵 열 개를 사고 덤으로 한 개를 받았다.

상추 모종 파는 노인의 손에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검은 비밀 봉지들이 바스락거린다.


집을 향해 걸었다.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다.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에 모자를 눌러쓰고 중심가를 가로지르며 걸어서 집으로 왔다.


식집사 카페에 가입했다. 창가에 리톱스 화분을 올려놓았다.

리톱스는 자라지 않게 키워야 한다고 했다.


우울증 에피소드.


이런 날들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나의 일상은 벽면에 동굴을 만들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었다.


벽면을 지나 건너편으로 가지 못했다.


에피소드가 하나의 문양처럼 보일 때쯤, 나는 벽면의 끝을 만났다. 그리고 건너편으로 성큼 걸어갔다.

벽면에 줄지어 선 동굴들이 작품처럼 펼쳐졌다.


그래도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