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찌꺼기와 물감

그대로 남기는 인연

by정언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오래된 건조기 채반 가장자리에 묵은 찌꺼기가 있었다. 세척할 때마다 물에 불려 솔질을 했지만 개운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 그 찌꺼기가 거슬렸다. 강아지 간식으로 닭가슴살을 2주에 한 번은 말렸다. 채반 가장자리까지 빼곡하게 닭가슴살을 채웠다. 건조하면서 닭가슴살이 틈새로 들어가 눌러 붙었다. 건조하는 양을 줄여 보았다. 그러다 다시 양을 늘렸다. 채반에 남은 찌꺼기가 보일 때면 찜찜했지만 욕심이 앞섰다.

과탄산소다에 불리고 솔질을 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 망과 프레임 사이에 꼭 낀 찌꺼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방금 휴대전화에서 지운 문자 메시지와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가장자리 틈새를 이쑤시개로 파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아파왔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온라인 게임 동료였다. 말이 잘 통했다. 온라인 게임이 한창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통화하는 일이 잦았다. 동료는 명쾌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성격이었다. 그 명쾌함이 나는 좋았다.

어느 시점부터 동료는 바쁜 것 같았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힘들다고 했다. 나도 겪어 본 일이었다. 나는 동료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다. 동료는 가끔 내 연락을 받았지만 그저 그런 답으로 대화를 끊었다. 명쾌하게 내가 정리되었다. 전화번호를 지웠다. 순전히 내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내가 퇴사한다는 공고가 올라가자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자신도 퇴사하고 싶었는데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그 무렵 동료가 옮길 근무지는 내가 있던 곳이었다. 짐을 정리하는 날 동료와 마주치지 않았다. 그날 지웠던 전화번호를 다시 저장했다.

퇴사 후 가끔 생각을 했다. 어제 아침 동료의 퇴사 소식을 접했다. 전화를 했고 문자를 남겼다. 두어 시간 지나 홀가분하다는 답이 왔다. 나는 퇴사 후 하고 싶은 일을 묻는 내용으로 답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 하루가 지나고, 나는 답이 없는 대화를 지우고 전화번호를 지웠다.


건조기 채반의 찌꺼기는 더 이상 뗄 수 없었다. 채반의 망을 고정하는 테두리 안에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테두리와 망 사이에서 몇 번이나 건조되었던 닭가슴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꺼내려고 애쓸수록 더 깊이 들어갔다. 나는 채반을 씻어 바람 잘 드는 곳에 두었다.


어떤 화가의 작업실이 떠올랐다. 캔버스 앞에는 물감들이 통에 담겨 있었다. 전시장에서 본 화가의 그림에는 나비를 품은 화려한 창이 그려져 있었다. 화가의 그림을 보며 현기증을 느꼈다. 나는 작업실에서 만난 물감의 색이 그대로 좋았다.


가장자리의 찌꺼기는 채반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인연은 그 시간 속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캔버스로 옮겨가지 않은 물감통을 오래 보고 있었다.


여름 내 가려웠던 염증이 미간을 괴롭혔다. 이젠 피부과에 가야겠다.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건조기 채반은 말라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