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MZ 사원이 내밀어준 작은 거울
올해 초, 회사 인사이동이 있었다. 사무실 멤버들이 대거 바뀌었고, 내 뒤자리에도 새로운 직원이 왔다. 귀여운 MZ 아가씨였다. 그런데 이 처자, 뭔가 범상치 않았다.
어느 날 불룩한 종이봉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에 슬쩍 쳐다봤더니, 캐릭터 피규어를 모니터 앞에 하나둘 줄 세워놓는 것이 아닌가. 아직 서로 대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먹서먹하던 시기였지만, 올망졸망 귀여운 피규어들에 마음을 뺏긴 나는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어머, 이게 뭐예요?”
내가 소리치듯 다가가자, 그녀는 수줍게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헤헷, 제가 라이언을 좀 좋아해서요~”
이건 무슨 라이언이고, 저건 무슨 라이언이고, 하나하나 소개해주는데 제주 해녀 옷을 입은 라이언은 제주도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라이언이라며 유독 목소리를 높였다. 후훗. 귀여워라.
그녀의 행보는 그 뒤로도 흥미로웠다.
1인 1텀블러의 시대. 바카라상 위에 커다란 텀블러 하나쯤 올려두는 건 이제 기본이지만, 그녀의 텀블러는 달랐다.무슨 황제의 물잔인 양, 번쩍번쩍 황금빛이 나는 텀블러였다.
“우와, OO 씨 텀블러 포스가 장난 아닌데요?!”
내 탄성에 그녀는 짐짓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
“이게 말이죠, 라스베이거스에서만 파는 텀블러랍니다. 저도 인터넷 보고 반해서, 라스베이거스 가는 지인한테 부탁해서 샀어요.”
이욜. 세상 화려한 라스베이거스는 텀블러도 이렇게 삐까뻔쩍하구먼.
어느 날부터인가 그녀의 바카라상에는 몰랑몰랑한 뜨개 인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인형의 머리핀부터 옷까지 따로 구입해 커스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입이 떡 벌어졌다. 내 어린 시절 종이인형 옷 입히기를 넘어, 이제는 뜨개 인형을 마음대로 꾸미는 세상이라니!
경직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그녀는 유난히 자기답게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직원들은 대부분 자리에서 벗어나 산바카라을 가기 바쁜데, 그녀는 바카라상에 앉아 뿅뿅뿅 스마트폰 게임을 하곤 했다. 어떤 날은 앞머리에 구루프를 말고 뽕을 넣기도 하고, 어떤 날은 쿠션 퍼프로 얼굴을 팡팡 두드리며 화장하기 바빴다. 고양이 두 마리와 개 한 마리를 키우는 그녀가 까만 코트에 고양이 털을 잔뜩 묻히고 출근할 때면, 사무실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문득 ‘흔적’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조심성이 없어 늘 사고와 흔적을 남기는 아이였다. 물컵을 엎지르고, 식탁에 음식을 흘리고 먹어 부모님께 '살아있는 태풍'이라 불렸고, "하는 게 왜 그 모양이니!"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그 말들은 내 안에 깊이 뿌리박혀, 어른이 된 지금도 스스로에게 "나는 왜 하는 게 이 모양일까"라고 묻게 만들었다.
그런데 뒷자리의 MZ 사원은 달랐다. 그녀를 볼 때마다 '어쩜 저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흔적을 남길까?'라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라이언 피규어도, 번쩍이는 텀블러도, 털 묻은 코트도, 구루프를 말고 앉아 있는 모습도. 그녀의 흔적은 누구를 힘들게 하는 자국이 아니라, 그저 ‘아, 여기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고 웃게 만드는 표시 같았다.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이제는 남의 수고를 요하는 어린아이의 실수가 아닌데도, 나는 왜 그토록 나의 흔적을 고깝게 바라보며 스스로를 조심스럽게 가두어왔을까.
어쩌면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나를 더 어여쁘게 봐도 좋다고 알려주는 거울 같은 존재가 아닐까.
나는 내 바카라상을 바라보았다. 싱그러운 숲 사진이나 좋아하는 영화 엽서를 바카라상 유리 밑에 살짝 밀어넣은 모습을 마주하자 이제는 나의 취향을 납작하게 눌러둘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품샵에 가서 샴고양이를 닮은 털뭉치 인형을 하나 사서 모니터 위에 올려두었다. 인형의 동그란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에서 뭉클함이 차올랐다.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주인공이 “우린 항해자였어!” 라고 외치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것처럼, 나도 이제야 나를 마주한다.
"나는 세상에 나만의 흔적을 남기러 온 사람이야.
어릴 적부터 남겨온 그 엉뚱한 흔적들이 사실은 나의 씨앗이었어.'
자, 이제 나만의 흔적을 마음껏 흩뿌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