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하고 다정한 점심시간
회사에서 하반기 근무평가 결과가 나왔다. 같은 직급 중 꼴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같은 직급 네 명 중 땡퇴근을 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저녁까지 불을 밝히며 일을 이어갈 때면 나는 슬그머니 가방을 챙겼다.
아이들 저녁밥을 내 손으로 해 먹이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가능할지 모르는, 우리 네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저녁을 지키고 싶었다. 장거리 출퇴근이라는 그럴듯한 핑계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거의 매일 정시퇴근을 감행했다. 그러니 결과가 아주 뜻밖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속상했다. ‘예상했다’와 ‘괜찮다’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누구에게라도 툭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작은 조직에서 비밀은 오래 비밀로 남지 않는다.
“쟤 이번에 평가 제일 낮게 나와서 속상해하더라.”
며칠 뒤 누군가의 입을 통해 돌아올 내 이야기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았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표정을 반듯하게 접어넣고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식당에 가니 얼마 전까지 차갑게 나오던 메밀국수가 어느새 온메밀로 바뀌어 있었다. 계절은 내가 모르는 사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달달하고 뜨끈한 국물을 후후 불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사각형 사무실에서 종일 네모난 바카라상과 네모난 의자 사이에 끼어 사는데 점심시간마저 의자에 붙어 있으면 정말 ‘좌식인간’이 될 것 같아 밥을 먹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늘 가던 공원으로 가서 초록 샤워나 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쿵짝쿵짝.
노랫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근처 체육관이 평소와 달리 북적였다.
‘노인의 날 기념식 및 실버 체육대회.’
입구부터 심상치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하얗게 차려입은 할아버님은 샛노란 머리띠를 질끈 두르고 성큼성큼 걸어가셨고, 한쪽에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선명한 연두색 바지를 입은 할아버님이 다리를 괴고 앉아 계셨다.
쿵짝쿵짝.
결국 발길이 체육관 안으로 향했다. 마침 공연이 한창이었다. 가슴에 빠알간 꽃을 단 할머니들이 짧은 스커트를 입고 무대 위에 서 계셨다. 손이 올라가면 발이 따라가고, 발이 움직이면 이번엔 엉덩이와 허리가 요리조리 돌아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앙증맞고 또 당당한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세상에, 너무 귀엽다.”
어느새 나는 엄마 미소를 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머릿속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꼴등’이라는 두 글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에는 반짝이는 옷과 빨간 꽃,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과 발, 그리고 활짝 핀 얼굴들뿐이었다.
‘존경받는 어르신, 건강한 노후.’
커다란 글씨가 체육관 한쪽에 걸려 있었다.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점심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더 보고 싶었지만 다시 공원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의상과 발그레한 얼굴들을 마음 한쪽에 챙겨 넣은 채.
공원 한가운데에서는 분수가 힘차게 물을 뿜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걷고 물줄기를 바라보다 보니 아침부터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도 조금씩 느슨해졌다.
돌아가는 길에 할아버님 두 분이 사진을 찍고 계셨다. 한 분이 찍으면 다른 한 분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포즈를 취하고, 다시 자리를 바꾸어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두 분이 같이 서 있는 사진도 있으면 좋을 텐데. 괜스레 오지랖이 발동했다.
“두 분 같이 찍어드릴까요?”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나오라고 액정을 옷자락에 쓱쓱 닦았다. “자, 좀 웃어보세요. 몇 장 계속 찍을게요. 이번에는 가로로도 찍어드릴게요.”
찰칵.
찰칵찰칵. 사진 속 두 분의 어깨가 나란히 붙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핸드폰을 돌려드리고 가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좀 찍어줘요.”
다시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찰칵.
이번엔 정말 가려는데 또 다른 어르신들이 나타났다. 독사진을 원하는 분. 다 같이 찍고 싶은 분. 똑같은 사진이어도 꼭 자기 핸드폰에도 한 장 있어야 하는 분. 어느새 줄이 생겼다. 눈은 슬금슬금 시계를 향했다.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를 어째. 마음은 급한데 웃음이 났다.
“사진을 너무 잘 찍네.”
뜻밖의 칭찬까지 챙겨 받고서야 공원을 빠져나왔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 오래전 업무 때문에 방문했던 이유식 업체 대표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유식 다음 사업으로 노인식을 해보려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고 했다. 어르신들은 '노인식'이라는 이름만 붙어도 외면하신다고. 나이가 들어도 스스로는 여전히 청춘이니까. 그때는 재미있는 시장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이 조금 다르게 들렸다.
곧 죽어도 청춘.
빨간 꽃을 달고 허리를 요리조리 돌리던 할머니들. 샛노란 머리띠를 두른 채 성큼성큼 걷던 할아버님. 카메라 앞에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멋지게 포즈를 잡던 할아버님들. “나도 좀 찍어줘요.” 사진 한 장을 더 남기고 싶어 카메라 앞으로 모여들던 얼굴들.
그 얼굴 어디에도 저물어가는 사람의 표정은 없었다.
오히려 한창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침과 똑같은 네모난 바카라상, 네모난 의자, 똑같은 모니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아침 내내 마음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근무평가 결과가 어느새 조금 뒤로 밀려나 있었다. 그 자리에는 어르신들의 미소가 들어와 있었다.
“나도 좀 찍어줘요.”
생각하니 또 피식 웃음이 났다.
곧 죽어도 청춘이라더니.
아니, 그분들은 그냥 청춘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뒤면 나도 가방을 챙겨 집으로 갈 것이다. 아이들 저녁밥을 하고, 우리 네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을 것이다. 아침에는 조금 서러웠던 그 선택이, 오후에는 다시 내가 좋아하는 삶의 모양으로 보였다. 마음이 보들보들해졌다. 참 이상한 점심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