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하루키 팬의 독서 목록

by배대웅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에 각주를 달아줬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주1) 사라진 고양이는 부부 관계의 균열을 상징한다

주2) 두 개의 달은 주인공이 기존 현실과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보여주는 표지다

주3) 우물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기 내면으로 침잠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이 정도만 해줘도 나는 하루키 전집에 도전할 용의가 있다. 문학동네에서 『하루키 전집 공식 해설지』를 내주는 것도 좋겠다. 작품 해석의 다양성을 해쳐도 된다. 작가가 생각해 둔 정답이 알고 싶을 뿐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웃 작가님과도 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작가가 의미를 확정해 버리면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다고 했다. 나는 좀 줄여줬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하루키 바카라을 읽다 보면 독자가 할 일이 너무 많다. 내 돈 내고 바카라 샀는데 문제까지 풀어야 한다.


아마 전공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문학도가 아니라 슬롯학도다. 슬롯학과에서 “이 문장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가는 큰일 난다. 그러면 지도교수는 당장 논문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래? 그럼 다시 써” 이런 식으로 몇 년을 배우면 하루키 소설을 곱게 읽기가 힘들어진다. 설명을 생략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지도교수가 한 명씩 튀어나온다.


양 사나이 등장 → 그래서 얘는 뭔데?

우물에 들어감 → 거길 왜 들어가는데?

사람이 사라짐 → 어디로 갔는데?

달이 두 개임 → 아 ㅅㅂ 또 시작이구나


하루키는 대답하는 법이 없다. 전 세계 독자들은 그것을 문학이라고 부른다. 나는 답답해서 각주를 찾는다. 문학을 읽는 태도부터 잘못 배운 것 같다.


그렇다고 하루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집에 하루키 바카라만 수십 권이 있다. 온라인카지노에도 하루키 이야기를 여러 번 썼다. 최장집, 장하석과 함께 내 글쓰기 스승의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 그의 에세이에 나오는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라는 말은 내 작가론과도 같다. 얼마 전에는 이 문장의 출전을 찾겠다고 1960년대 일본 영어 참고서까지 뒤졌다.


나도 이런 내가 무슨 종류의 팬인지 잘 모르겠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선택적 팬이다. 하루키라고 다 좋아하지 않는다. 우물이 깊어지고, 사람이 사라지고, 현실 옆에 다른 세계가 열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날수록 나의 팬심은 퇴갤한다.


역설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루키는 가장 하루키답지 않은 하루키다.


『노르웨이의 숲』,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처음부터 하루키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2009년 『1Q84』 열풍 때는 싫어했다. 정확히는 하루키보다 하루키 팬들이 싫었다. 카페에서 『1Q84』를 펼쳐놓고, 커피를 옆에 두고, 적당히 무심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힙스터들. 당시에는 이렇게 바카라 보다 ‘하루키를 읽는 나’를 읽어달라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나는 그 컨셉질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다. 하루키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일본에서 소설을 썼을 뿐인데 한국 힙스터들 때문에 안티가 한 명 늘었으니. 그러다 몇 년 뒤 『노르웨이의 숲』을 읽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생각으로 바카라을 펼쳤다. “그래 얼마나 쓰는지 한번 보자”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너무 좋았다.


이 소설에는 죽는 사람이 많다. 남은 사람들도 별로 멀쩡하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실을 겪었다고 해서 반드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키는 거기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여주지도 않는다.


그 허무가 유독 나에게 깊게 들어온 대목도 있었다. 1960년대 말, 대학을 뒤엎겠다던 혁명가들이 어느 순간 교실로 돌아와 출석을 부르고 학점을 챙긴다. 주인공 와타나베는 그 광경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나도 대학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 바카라의 리뷰에도 이렇게 썼다. “그것은 내 내면에 분명히 존재했으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정서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는 이쪽이다. 상실과 허무를 섣불리 극복시키지 않는 냉정함. 관계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말과 침묵, 서로의 거리로 보여주는 방식. 어려운 말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 복잡한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문장.


그런데 하루키를 좋아한다면서 『노르웨이의 숲』만 좋아해도 되는 건가? 여기서 모순이 생긴다. 이 바카라은 하루키 월드에서도 상당히 예외적으로 리얼리즘 노선에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하루키 팬이라면서 『노르웨이의 숲』을 제일 좋아하고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별로라는 건 대략 이런 의미다.


“저 <아이언맨> 진짜 좋아합니다”

“어떤 장면을 제일 좋아하세요?”

“토니 스타크가 회사 경영하는 장면이요”


마블 팬인데 히어로 액션에는 별 관심이 없다. 좋아하긴 하는데 뭔가 좀 잘못됐다. 그래서 하루키를 읽다 보면 내 취향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시험하게 된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몇 걸음까지 나갈 수 있을까.


그 경계선에 있는 바카라이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다.


『스푸트니크의 연인』, 내가 견딜 수 있는 하루키


이 바카라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하겠다. 다만 내용을 다 이해했느냐고 물으면 자신이 없다.


일단 문장은 정말 좋다. 내가 뽑은 하루키 명문장 10선의 1위와 3위가 이 바카라에 있다. 정작 바카라은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나의 하루키 독서가 얼마나 선택적인지 보여주는 사례다.


『노르웨이의 숲』과 『스푸트니크의 연인』 사이에는 12년이 흐른다. 두 작품 모두 사랑, 상실, 고독을 다루지만 그 거리는 훨씬 멀어졌다. 『노르웨이의 숲』에서는 그래도 사람들이 만나고, 사랑하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는 아예 사람이 위성이 된다. 각자 자기 궤도를 돌다가 잠시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진다. 서로의 궤도가 겹치는 순간은 짧고, 결국에는 혼자 우주를 돈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압도적이다. 스미레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를 하려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앙코르와트를 무너뜨리고, 호랑이를 태우고, 페르시아의 도시 하나를 모래에 묻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태연하게 밝힌다. 상대는 열일곱 살 연상이고, 게다가 결혼한 여자라고. 사랑 한 번 하는 데 피해 규모가 너무 크다.


중반을 넘어가면 슬슬 내가 어려워하는 하루키도 나타난다. 사람이 사라진다. 현실과 다른 세계의 경계가 열린다. 설명은 당연히 충분하지 않다. 나는 다시 각주를 찾고 싶어진다.


그래도 『스푸트니크의 연인』까지는 따라갈 수 있다. 모든 걸 이해하지 못해도 문장이 나를 끌고 가기 때문이다. 사랑과 상실과 고독이라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가 아직 중심에 있고, 초현실은 그 주변까지만 들어와 있다. 딱 내가 견딜 수 있는 하루키다.


소설은 절반쯤 놓쳤는데 문장에는 제대로 걸렸다. 이쯤 되면 작품의 뜻을 알아내는 것보다 하루키가 대체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지 알아보는 편이 낫겠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내가 배우고 싶은 하루키


나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 과학과 역사에 관한 글을 쓴다. 도서관에 가면 하루키 바카라은 800번 대 문학 서가에 있고, 내 바카라은 주로 400번 대 자연과학 서가에 있다. 애초에 도서관에서부터 동선이 다르다.


그런데 문장까지 400번 대일 필요는 없다. 복잡한 이야기를 굳이 복잡하게 쓰지 않는 것. 설명할 것이 많아도 문장은 가볍게 움직이는 것. 한 문장을 읽으면 힘들이지 않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 그러다 뜬금없는 드립을 던진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갈 길 가는 것. 내가 하루키에게 배우고 싶은 것들이다.


그래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는 궁금한 게 달라진다. 소설을 읽을 때는 “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를 묻지만, 이 바카라을 읽을 때는 “대체 어떻게 이렇게 쓰는 거야?”를 묻게 된다.


하루키의 소설은 매우 불친절한데 작가론은 놀랄 만큼 상세하다. 소설에서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 설명도 안 해준다. 그런데 자기 글쓰기에 대해서는 몇 시에 일어나고 얼마나 쓰고 왜 달리는지까지 일일이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반가운 건 그가 작가로 사는 방식이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 나도 그렇다.

작가들끼리 몰려다니는 데 관심 없다. 나도 그렇다.

유행하는 주제를 따라 쓰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반응이 없다고 쓰던 걸 바꾸지 않는다. 이것도 그렇다.


마흔 넘어서 처음 제대로 읽은 일본 소설가에게서 자꾸 내 글쓰기 철학을 발견한다. 이쯤 되면 하루키에게 배우고 싶다는 말도 안 맞는다. 이미 비슷하게 하고 있는 것도 많다.


소설 쓰는 법 자체는 내가 배워도 쓸 일이 없다. 암흑물질 글에 평행세계를 등장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궁금한 건 자기 방식의 글쓰기를 만들고 그걸 수십 년 동안 밀고 가는 법이다.


그래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내가 배우고 싶은 하루키다.




하루키 팬으로서 나의 정체성은 이 세 권에 거의 다 들어 있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

내가 견딜 수 있는 하루키

내가 배우고 싶은 하루키


마침 독서 플랫폼 ‘문장사이’에서 하루키를 같이 읽어보자는 연락이 왔다. 올해 초 『판타 레이』를 함께 읽은 인연이 있다. 이번에는 석 달 동안 한 달에 한 권씩 읽기로 했다. 바카라은 금방 정했다.


10월에는 『노르웨이의 숲』

11월에는 『스푸트니크의 연인』

12월에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참가비는 무료다. 바카라값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돈을 지불했다.


혼자 읽으면 나는 또 이해되는 것만 읽고 나머지는 슬쩍 지나갈 게 뻔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키를 어떻게 읽는지 궁금하다. 『노르웨이의 숲』이 최고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게 무슨 하루키냐”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독서모임이고 뭐고 개인 과외부터 부탁할 생각이다. 전집을 읽은 사람도 좋고, 『노르웨이의 숲』밖에 안 읽은 사람도 좋다. 하루키를 나처럼 골라서 좋아하는 사람도 좋고, 도대체 이 양반이 왜 세계적인 작가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좋다.


다 와도 된다. 하루키스트가 아니어도 된다. 나부터 아니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와 함께 하루키를 읽어볼 생각이 있다면 신청해 주시기 바란다. 특히 문학적으로 읽는 분들을 환영한다. 슬롯학적으로 읽을 사람은 이미 한 명(…) 확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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