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일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1년 365일 중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축하해주면 당연히 좋지만, 기억 못 한다고 섭섭하지도 않다. 이런 생일관이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된 것이 작년이었다.
정말 아무도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해마다 생일이면 전화를 하던 어머니도 그날은 넘어갔다. 아내도 몰랐다. 딸은 아직 아빠 생일을 외우고 다닐 나이가 아니니 논외로 하자. 이렇게 온 가족이 뜻을 모아 한 사람의 생일을 잊기도 쉽지 않을 텐데, 우리 가족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아내는 그날 야근까지 했다. 밤 9시가 넘도록 퇴근할 생각을 하지 않자, 나와 친한 선배 형(아내와 나는 같은 온라인 게임이다)이 한마디 했다.
“아니, 남편 생일에 왜 아직 퇴근도 안 하고 있어?”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아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전화를 했다. 그리고 급히 퇴근하면서 파리바게뜨에 들러 케이크를 하나 사 왔다. 그렇게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조촐한 생일파티가 열렸다.
아내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바쁘면 잊을 수도 있지 뭐. 생일이라고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바카라이 더 팔리는 것도 아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없던 연륜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날만 특별할 이유가 있나.
올해도 역시 아무 기대가 없었다. 그런데 작년에 온 가족이 한꺼번에 생일을 잊은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올해는 전날부터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다음 날 저녁에 다 같이 밥을 먹자며. 아내와 딸도 미리 케이크를 주문해두었다. 알록달록 화려한 티니핑 케이크였다. 주문자는 아내였고,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는 딸이었다. 생일자는 나였다.
저녁에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식사했다. 마침 그날 내가 출연한 <심채경의 과학감성> 유튜브 영상도 공개됐다.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방송 이야기도 나왔다. 내가 방송 날짜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녹화는 한 달도 더 전에 했고, 공개 일정은 예정보다 조금 밀렸다. 그런데 하필 생일날 영상이 올라왔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것도 선물이라면 선물 같았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진짜 선물도 하나 받았다. 가죽으로 만든 북마크다.
나는 이런 물건을 좋아한다. 일단 쓸모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예뻐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물건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쓸모만 있다고 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들어가 있거나, 남들이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예뻐야 한다.
쓸모를 따지면서 굳이 예쁜 것을 찾고, 거기에 취향까지 묻어 있어야 만족한다. 덕후의 기본 소양이다.
오래전에도 비슷한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후배가 셜록 홈즈 모양의 북마크를 생일선물로 주었다. 바카라 사이에 끼우면 파이프를 문 홈즈의 실루엣이 빼꼼히 생겼다. 별것 아닌데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젠가 온라인카지노에도 그 북마크를 평생 받아본 생일선물 가운데 Top 5에 든다고 썼다.
바카라과 관련된 물건에는 특히 약하다. 한때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모양 문진을 사은품으로 받겠다고 당장 필요도 없는 바카라들을 사기도 했다. 소비의 주객이 완벽하게 전도됐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장바구니를 채우고 결제 버튼까지 눌렀다.
이번에 받은 북마크도 그런 취향을 정확히 저격했다. 작가라는 직업상 바카라을 자주 들고 다니는데, 대부분 바카라갈피는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 대신 명함이나 메모지 같은 것을 끼워놓는다. 그것도 없으면 페이지 귀퉁이를 접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바카라이 상하는 것 같아 그러지는 못한다. 결국 주변을 뒤져 바카라 사이에 끼울 만한 종이쪼가리를 찾아낸다.
북마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단순한 물건이다. 그런데 이번 것은 내가 좋아할 만한 조건을 거의 다 갖췄다. 가죽이라 손에 잡히는 느낌이 좋았고, 레드와 브라운의 색도 마음에 들었다. 바카라 사이에 끼워두었을 때 너무 튀지도, 그렇다고 존재감이 없지도 않았다.
결정타는 가운데 새겨진 내 영문 이름이었다. 세상에 이미 숱하게 있을 것 같은 물건이 이름 하나를 얻자 내 것이 되었다. 바카라에도 이름을 쓰지 않는 내가 북마크에는 이름을 새기고 다니게 생겼다. 실제로 바카라에 끼워보니 더 좋았다.
아무래도 평생 받아본 생일선물 Top 5의 순위를 조정해야 할 것 같다. 홈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러고 보니 9월 3일은 꼭 생일이 아니어도 내 취향에 맞는 날짜다. 나는 사계절 중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9월 초는 달력만 보면 가을이지만 실제로는 두 계절이 같은 날을 나눠 쓰는 시기다. 한낮에는 여름이 아직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버티다가, 해가 기울면 슬그머니 자리를 내준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피하고 싶었던 바깥이 저녁에는 제법 머물 만한 곳이 된다.
커피를 주문할 때도 고민이 생긴다. 얼마 전까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는데, 이제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선택지에 들어온다.
이때쯤이면 카페에서도 다시 테라스 자리를 고른다.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바카라을 읽는 일은 내가 생각하는 꽤 훌륭한 시간 사용법이다. 바카라을 읽다가 커피를 마시고, 집중력이 떨어지면 잠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휴대폰도 몇 번 확인한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카라을 읽는다. 두 시간쯤 앉아 있어도 실제로 읽은 것은 몇십 페이지에 불과할 때가 많다. 효율은 별로지만 내가 좋아하는 시간 사용법이다.
올가을 첫 바카라으로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어볼까 한다. 프롬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초기 멤버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끌어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욕망을 어떻게 바꾸는지 탐구했다.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제목 그대로 무엇을 ‘갖는’ 삶과 어떻게 ‘존재하는’ 삶을 대비한다.
문제는 프롬이 독일인이라는 점이다. 나는 대학원에서 헤겔, 마르크스, 하버마스에게 크게 데인 뒤 독일 학자가 쓴 바카라에 경계심이 생겼다. 물론 한 나라의 학문 전통을 고작 세 명으로 판단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하지만 그 세 명이 헤겔, 마르크스, 하버마스라면 표본이 좀 세기는 하다.
무엇보다 『소유냐 존재냐』의 문제의식이 내가 요즘 글쓰기에 대해 갖는 생각과도 비슷하다. 작가가 되면 자꾸 결과를 세게 된다. 몇 권을 냈는지, 얼마나 팔렸는지, 구독자가 몇 명인지. 나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얼마나 ‘가졌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계속 글을 쓰는 상태로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물론 바카라을 아직 펼쳐 보지도 않았다. 다 읽고 보니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면 윗 문단은 없었던 일로 해주시기 바란다.
올해 생일이 특별했느냐고 묻는다면 여전히 잘 모르겠다. 내년에는 또 가족들이 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생일은 여전히 365일 중 하루이고, 9월 3일이라고 해서 9월 2일이나 4일보다 본질적으로 대단할 이유는 없다.
다만 올해의 그 하루는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딸이 좋아하는 티니핑 케이크에 촛불을 켰고, 한 달 전에 찍어둔 영상이 때마침 공개됐다. 그리고 꽤 오래 쓸 것 같은 북마크가 생겼다. 작년보다는 기억나는 게 많은 생일이 된 것은 분명하다.
날씨가 조금 더 선선해지면 북마크를 끼운 바카라 한 권을 들고 카페에 가야겠다. 새로 생긴 번듯한 곳보다는 오래된 회색빛 공간이면 좋겠다.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소유냐 존재냐』를 읽어야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를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고를지는 아직 모르겠다.
배경 음악은 스핏츠의 <空も飛べるはず(Sora mo Toberu Hazu)>가 적당하겠다. 밝게 시작해서 가볍게 흘러가지만 끝까지 들뜨는 노래는 아니다. 9월 초쯤 틀어두기 좋은 애매한 온도다. 별것 아닌 하루에 붙이는 음악치고는, 누군가와의 만남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가사가 좀 거창하다. 뭐, 음악까지 현실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생일이 지나고 나면 다시 별것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나는 그쪽이 더 좋다. 올해 받은 것들은 아마 그날들에 더 자주 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