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별 상관없는 일들을 동시에 하고 있다. 바카라을 고치고, 20년 된 드라마를 다시 보고, 온라인카지노에 과몰입하고 있다. 셋을 한데 묶을 이유는 딱히 없다. 나름 공통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그런 건 없었다.
그래서 묶어봤다.
『연구소의 승리』 원고를 수정 중이다. 이 바카라은 안 팔려도 너무 안 팔렸다. 2쇄 따위는 애초에 세계관에 없었다.
그런데 세종도서에 선정되면서 정부가 몇백 권을 사준다고 한다. 덕분에 2쇄를 찍게 됐다. 시장경제가 외면한 바카라을 정부가 구제한 셈이다. 국가 연구소들의 역사를 다룬 바카라답게 결말까지 국가 의존적이다.
출판사에서 증쇄에 들어가기 전에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바카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었다. 틀린 것들이 생각보다 꽤 나온다.
W보손과 Z보손의 질량이 1960년대에 실험으로 입증됐다는 부분이 그렇다. SSC가 양성자-반양성자 충돌기로 설계됐다는 설명도 틀렸다. 새로운 원소가 합성에 성공할 확률도 마찬가지다.
이 바카라을 쓸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남의 바카라처럼 다시 읽으니 안 보이던 오류들이 보인다. 2쇄를 찍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것이다.
수정할 부분을 PDF에 하나씩 메모로 표시했다. 연대 삭제. 충돌 입자 교체. 수치 변경. 대부분 몇 글자 고치면 끝나는 일이었다.
본문 교정은 끝났다. 그런데 마지막 ‘감사의 말’에도 고칠 부분이 하나 있었다.
윤이창 작가님.
온라인카지노 초창기부터 내 글을 읽어준 분이다. 어려운 과학 글에도 늘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겨주셨다. 『연구소의 승리』 집필 초창기에 갈팡질팡할 때도 여러 의견을 주셨다. 그래서 감사의 말에도 이름을 넣었다.
바카라이 나오면 한 권 보내드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바카라이 나오기 직전 작가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나는 ‘윤이창’이 본명인 줄 알았다. 돌아가신 뒤 따님이 온라인카지노에 남긴 글을 보고서야 본명이 ‘윤성제’라는 것을 알았다. 댓글로 서촌에서 차 한잔하자는 이야기도 나눴지만, 끝내 온라인카지노 밖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본문에서는 틀린 것을 발견할 때마다 바로 메모를 달았다. 다만 여기서는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한동안 그 이름을 그대로 두었다.
마지막에야 그 이름에도 수정 메모를 달았다.
윤이창 → 故 윤성제
<하얀거탑>을 다시 보고 있다. 알고리즘이 띄운 수술방 숏폼 몇 개에 낚여서 20부작 풀코스 정주행 중이다. 이게 대체 몇 번째 정주행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외과 과장 선거와 의료소송의 서스펜스가 쫄깃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한 질문이 든다.
저 인간들은 왜 원하는 걸 가장 비싼 방법으로 얻지?
장준혁부터 그렇다. 외과 과장이 되는 가장 싼 방법은 이미 있다. 이주완 앞에서 1년만 착한 제자 코스프레를 하면 된다.
“교수님 덕분입니다.”, “계속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리고 과장 자리 물려받는 순간 폰 번호 차단 및 카톡 알림 끄기 크리. 비용은 자존심 약간이고, 편익은 대한민국 최고 병원 외과 과장이다. 수익률이 미쳤다.
그런데 장준혁은 이걸 못 한다. 더 웃긴 건 원래 아부를 못 하는 인간도 아니라는 점이다. 선거전 들어가면 우용길과 오경환에게도 숙이고, 싫은 사람에게도 웃고, 거래도 서슴없이 한다. 생판 남한테는 자존심을 아무렇지 않게 내던지는데, 이주완한테만 고개를 못 숙인다.
우용길에게 숙이는 건 비즈니스지만, 이주완에게 숙이는 건 내가 아직 당신 밑임을 인정하는 사상 검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준혁이 진짜 원한 건 과장 자리가 아니라, 이주완의 입에서 나오는 “이제 내가 너보다 아래다”라는 항복 선언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말 한마디를 못 들어서 가성비 최강 옵션을 던져버린다. 대신 민충식의 돈을 쓰고, 유필상을 끌어들이고, 우용길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교수들 로비에 권력 투쟁까지 풀코스로 탄다. 자존심 하나 지키겠다고 병원 전체를 결제수단으로 쓴다.
이주완도 똑같다. 냉정하게 보면 장준혁에게 과장 자리를 넘기는 게 자기한테도 최고의 거래다. “내가 키운 최고의 제자에게 외과를 맡깁니다.” 이 한마디 던지고 퇴임하면 평생 ‘장준혁의 스승’으로 꿀빨 수 있다. 장준혁이 세계 최초 수술에 성공할 때마다 지분 50%는 자동으로 적립된다.
그런데 이주완에게 장준혁의 취임은 단순한 인수인계가 아니다. ‘이주완 시대의 종말’이라는 공식 사망 선고다. 이 사람은 그걸 못 견딘다.
그래서 자기 시대를 연명시키려고 미국에서 노민국을 공수해온다. 장준혁을 막겠다고 자기 퇴임식을 병원 내전으로 바꾼다.
노민국은 또 왜 오는지 모르겠다. 이 양반이야말로 진짜 딜 구조가 이해가 안 된다.
일단 존스홉킨스대학 교수다. 그런데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이주완의 용병이 되어 혈혈단신 한국으로 온다. 이어서 대한민국 최고 외과의 장준혁과 맞붙는다. 이 싸움은 이겨도 문제다. 자기를 데려온 이주완은 곧 은퇴하고, 조직은 이미 장준혁 사람들로 가득하다.
상품 설명서를 정직하게 쓰면 이렇다.
존스홉킨스대학 교수직 포기 → 남의 후계 전쟁 참전 → 교수들 표 구걸 → 장준혁과 원수 → 당선 후 적대적 조직 인수.
아니 대체 이걸 왜 사냐긔.
결국 셋 다 엘리트인데 자기 문제만 나오면 헛똑똑이가 된다. 장준혁은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이주완은 자기 시대가 끝나면 안 되고, 노민국은 불리한 판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것을 가장 싸게 얻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누구라고 믿는지를 지키려고 제일 비싼 선택을 한다.
물론 셋이 제정신을 차리고 가성비 테크를 탔다면 <하얀거탑> 20부작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1화: 장준혁이 1년 동안 참음.
2화: 이주완이 두 눈 딱 감고 양도함.
3화: 퇴임식에서 둘이 억지 미소 지으며 악수. 명인대 병원 정상 운영. 끗.
(※ 노민국은 미국에서 햄버거 먹는 중)
그 와중에 혼자 비용편익 분석을 제대로 하는 인간이 있다. 바로 우용길이다.
이주완이 회의에서 장준혁을 제거할 수 있었던 기회를 아쉬워하며 말한다. “누가 봐도 좋은 기회였는데…”
우용길이 느긋하게 팩폭한다. “누가 봐도 좋은 기회란 말입니다, 말 그대로 누가 봤기 때문에 절대 좋은 기회가 아닙니다.”
다시 봐도 감탄했다. 이주완에게 ‘누가 봐도’는 명백하다는 뜻이다. 우용길에게 ‘누가 봐도’는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걸 누가 본다는 뜻이다. 상대가 방금 한 말에서 네 글자를 그대로 가져와 뜻만 뒤집었는데, 두 사람의 정치력 차이가 한 방에 설명된다. 캐릭터를 제대로 만들면 명대사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다. 그 인간에게 맞는 말을 시키면 그게 명대사가 된다.
자기 자존심 챙기느라 병원을 불태우는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냉정하게 판을 바라보는 우용길이야말로 <하얀거탑> 유일의 프로게이머다.
나는 온라인카지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다고 늘 생각했다. 글은 열심히 쓰지만 플랫폼에 과몰입하지는 않는다. 온라인카지노는 어디까지나 내 글을 쓰기 위한 작업실일 뿐이다.
최근 그 생각이 틀렸다는 증거들이 발견됐다.
며칠 전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 아파트를 무심코 봤다. 건물 벽면에 이렇게 쓰여있었다.
‘한이람’
어? 내가 아는 그 한이람 작가님? 글만 쓰시는 줄 알았는데 언제 아파트까지 지었지? 온라인카지노에서 서로 댓글이나 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건설 재벌이었다. 사람은 역시 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다시 봤다.
‘한아름’이었다.
이 정도면 시력 문제가 아니다. 뇌가 온라인카지노에 절여진 것이다.
얼마 뒤에는 내 온라인카지노 생활을 그림 한 장으로 요약해주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평소 좋아하는 마봉 작가님이 작품에 나를 캐릭터로 그려주셨다. 마음에 들었다. 너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표정의 고증이 훌륭하다. 술집에 앉아 턱을 괴고 세상 모든 것이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실물보다 슬롯성이 좋아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상당히 사실적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 에도가와 코난과도 살짝 닮았다.
하지만 킬포는 뒤에 있었다. 바카라이 세 권 놓여 있다.
『노르웨이의 숲』.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카라이다.
『연구소의 승리』. 내 대표작이다.
『온라인카지노의 멸망』. 아직 세상에 없는 바카라이다. 언젠가 쓰고 싶은 바카라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바카라, 쓴 바카라, 써야 할 바카라이 한 화면에 모였다. 과거, 현재, 미래의 욕망이 모두 구현된 셈이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온라인카지노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그러고 보니 길에서는 아파트 이름을 온라인카지노 작가 이름으로 읽고, 집에서는 온라인카지노 작가가 그려준 내 캐릭터를 프로필 사진으로 쓰고 있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겠다. 온라인카지노와 적당한 거리는 무슨. 이미 입주까지 했다.
그것도 전세인 줄 알았는데 자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