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바카라임자는 왜 돌아오는가

by배대웅

어떤 연구소에서 수백억 원짜리 국가전략 연구과제를 시작한다. 나라의 미래가 걸린 사업이다. 성공하면 새로운 산업을 만들 수도 있고, 실패하면 몇 년의 시간과 수백억 원이 날아간다.


당연히 연구바카라임자 선정이 중요하다. 연구 실적은 어떤가. 비슷한 과제를 수행한 경험이 있는가. 세계적인 연구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가. 수십 명의 연구자를 이끌 능력이 있는가. 연구 계획은 합리적인가. 경쟁자보다 나은 점은 무엇인가.


그런데 연구소가 뜻밖의 사람을 물망에 올린다. 10년 전 같은 분야의 대형 과제를 맡았다가 실패한 국내 과학자다. 당시 과제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고, 그는 연구바카라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뒤 국내에서 경력을 이어갔지만, 세계 무대에서 연구 능력이 달라졌음을 보여줄 증거는 충분하지 않다. 국내 학술지 논문 몇 편은 있으나, 흔히 말하는 NSC급 유명 학술지 실적은 없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 과학자도 실패한다.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말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재도전의 근거다. 그때 왜 실패했는가. 그 뒤 무엇이 달라졌는가. 새 방법론은 있는가. 연구진은 보강되었는가. 이번에는 왜 성공할 수 있는가.


더구나 다른 후보도 있었다. 세계적 연구기관에서 일했고, 피인용 지수와 인용 영향력 등 논문 실적도 뛰어난 외국인 과학자였다. 여러 나라의 연구진을 이끌어본 경험도 있었다. 연구 철학도 분명했다. 연구소는 그와 협상까지 진행했다. 그러나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연봉 문제였는지, 연구비 집행 권한 때문이었는지, 연구진 구성 조건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는 다른 나라 연구소로 갔다.


그리고 몇 달 뒤, 10년 전 실패했던 국내 과학자가 다시 연구바카라임자로 결정됐다. 이유는 이랬다. 국내 연구 생태계를 잘 안다. 연구소 사정을 이해한다. 구성원들과 소통이 잘 된다. 과거에도 이 분야를 맡아본 경험이 있다.


과학계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탈락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동료 과학자들은 선정 근거를 공개하라며 연판장을 돌릴 것이다. 평가위원은 누구였는지, 어떤 기준으로 점수를 매겼는지부터 따지고 들 것이다. 수백억 원짜리 국바카라사업이라면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기자들은 ‘10년 전 실패한 과학자의 석연찮은 귀환’ 같은 제목을 뽑을 것이다.


물론 과학계도 완벽하지는 않다. 이상한 일도 많고, 행정의 비합리도 많다. 그래도 몇백억 원짜리 사업을 맡기면서 “이분이 우리 사정을 잘 압니다”를 핵심 근거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실력을 검증한 뒤에나 붙일 수 있는 부가 점수다. 과거의 실패가 있다면 검증은 더 엄격해진다. 대형 사업에서 한 번의 실패는 그저 경력 한 줄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 기회를 얻으려고 할 때 가장 먼저 해명해야 할 부채다.


그런데 이것은 축구 이야기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앞의 국내 과학자는 홍명보다. 외국인 과학자는 제시 마치다. 수백억 원짜리 국가전략 연구과제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이다.


이렇게 바꿔놓고 보면 2024년 대한축구협회(이하 축협)의 국가대표팀 감독 선임이 얼마나 기괴했는지 보인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미 대표팀을 맡아 실패했던 감독이 10년 뒤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세계 무대에서 통할 만한 역량을 새롭게 입증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물론 울산에서 K리그 2연패를 했다. 그것도 성과는 맞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K리그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다. EPL, 라 리가, 분데스리가와 같은 급으로 놓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월드컵은 리그와도 다르다. 전쟁으로 치면 국지전이 아니라 국가 총동원전이다. 각 나라가 최고의 선수들을 불러 모으고, 최고의 코칭스태프를 붙여서, 몇 년간 준비한 모든 것을 한 달 안에 쏟아붓는다.


당시 유력한 대안도 있었다. 지금 캐나다 대표팀을 맡고 있는 제시 마치 감독이다. 축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일 수 있다. 미국 출신인 그는 뉴욕 레드불스, 잘츠부르크, 라이프치히, 리즈 유나이티드 등을 이끌었다. 세계적 명장까지는 아니어도 유럽 축구의 최전선에서 감독 생활을 해봤다. 무엇보다 자기 축구가 분명했다. 강한 압박, 많은 활동량, 빠른 전환. 성공과 실패를 떠나 무엇을 하려는 감독인지는 알 수 있었다.


축협도 마치를 검토했다. 하지만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고, 그는 2024년 5월 캐나다 대표팀으로 갔다. 한국은 두 달 뒤 홍명보를 선임했다.


그 뒤에 펼쳐진 결과는 잔인할 정도다. 마치는 캐나다를 2024년 코파 아메리카 4강에 올렸고,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서는 16강에 진출했다. 모두 캐나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48개국 체제의 월드컵에서 조별리그도 통과하지 못했다. 예전 32개국 체제 기준으로 보면 아예 본선에도 못 든 셈이다.

17826898594840.jpg한국행이 무산된 제시 마치는 캐나다로 갔다. 그리고 역사를 바꿨다.


이 정도면 화가 날 법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화를 냈다.


나는 열성 축구팬이 아니다. 세계를 선도하는 축구 전술을 깊이 이해하지도 못한다. 홍명보의 포메이션이 왜 문제였는지, 마치의 압박 전술이 한국 대표팀에 얼마나 잘 맞았을지 설명할 능력은 없다. 대신 나는 슬롯과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홍명보가 감독이 되는 과정을 보면서 화가 나기 전에 우선 궁금했다. 밖에서 보면 이렇게 이상한 결정이 조직 안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의외로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슬롯과학자들은 오래전부터 비슷한 문제를 연구해왔기 때문이다.


맞는 말만 모이면 틀린 결론이 나온다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인간과 조직이 언제나 최선의 답을 찾는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능력이 없다고 봤다. 모든 정보를 모을 수도 없고, 모든 대안을 비교할 수도 없다. 시간은 부족하고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정도 괜찮은 답을 찾으면 탐색을 멈춘다. 사이먼은 이를 ‘만족화(Satisficing)’라고 했다. 만족한다는 뜻의 satisfy와 충분하다는 뜻의 suffice를 합친 말이다.


축협도 처음에는 최선의 감독을 찾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임 과정이 길어지면서 여러 조건이 붙는다. 연봉은 예산에 맞아야 한다. 당장 계약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선수들을 이해해야 하고 국내 생활에도 적응해야 한다. 협회와 원만하게 일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상한 조건은 아니다. 문제는 조건이 늘어날수록 최초의 질문이 뒤로 밀린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가 가장 잘할 수 있는지”를 찾았다. 나중에는 “우리가 누구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따지게 된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이론이 끼어든다. 경영학의 ‘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다. 1976년 마이클 젠슨과 윌리엄 메클링은 기업의 소유자와 경영자가 같은 회사를 두고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문제를 분석했다. 회사는 10년 뒤의 성장을 원하지만, 경영자의 임기는 3년일 수 있다. 회사에는 큰 성공이 필요해도 경영자에게는 큰 실패를 피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누구의 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위험의 뜻이 달라진다.


축구팬에게 가장 큰 위험은 대표팀이 지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을 선임하는 축협에는 다른 위험도 있다. 비싸게 모셔 온 감독의 실패, 자기 철학이 강한 외국인 감독과의 충돌, 파격적인 후보를 밀었다가 망했을 때 돌아올 바카라임. 대표팀의 위험과 감독을 뽑는 사람의 위험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제시 마치와 홍명보의 장단점도 뒤집힌다. 마치는 자기 축구가 분명했다. 대표팀에는 장점일 수 있다. 반면 축협에는 불편할 수 있다. 자기 코칭스태프를 데려올 것을 요구하고, 선수 선발과 팀 운영에서 강한 권한을 원할 가능성이 높다. 기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유부터 물을 것이다.


실제로 연구소에서도 외국의 유명 과학자를 모셔 오면 비슷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들은 평소에 질문을 달고 산다. “왜 연구비를 약속대로 안 줍니까?”, “왜 이 사람이 연구팀에 들어옵니까?”, “왜 연구와 상관없는 보고서를 써야 합니까?”, “왜 내가 이 회의에 들어가야 합니까?”…


홍명보는 반대였다. 세계 무대에서의 검증은 부족했다. 대표팀에는 위험일 수 있다. 그러나 축협에는 익숙했다. 한국 축구와 K리그를 안다. 대표팀 감독과 축협이 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안다. 적어도 어디서 부딪힐지 가늠이 안 되는 사람은 아니다.


축협 사람들이 회의실에 모여 한국 축구를 망칠 방법을 궁리했을 리는 없다. 아마 모두 자기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예산도 봐야 한다. 국내 적응도 중요하다. 선수들과의 소통도 필요하다. 축협과도 원활하게 일해야 한다.


전부 맞는 말이다. 그렇게 맞는 말만 골라서 몇 달 동안 회의를 했다. 그리고 홍명보가 감독이 됐다.


회사 다녀본 사람이라면 기시감이 들 것이다. 처음부터 멍청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인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말도 맞고, 규정상 어렵다는 말도 맞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도 맞고, 괜히 일을 벌였다가 뒤집어쓸 수 있다는 말도 맞다. 회의실에 바보는 한 명도 없다. 그런데 회의가 끝나면 가장 바보 같은 결정이 나 있다.


허버트 사이먼의 이론대로 조직은 조건을 하나씩 붙이며 '최선의 답'에서 '감당 가능한 답'으로 내려온다. 대리인 문제에서 보듯 그 감당 가능함에는 조직의 성과만 들어가지 않는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의 위험과 편의도 함께 들어간다. 그래서 아무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는데 틀린 결론이 나온다. 아무도 실패를 원하지 않았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택을 한다.


이것이 조직의 이상한 합리성이다. 그리고 한국 축구가 그 합리성을 끝까지 따라가서 도달한 곳이 홍명보였다.


설마 32강도 못 가겠어?


물론 이 모든 일을 슬롯과학 이론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허버트 사이먼과 대리인 문제만으로 축협 회의실의 실제 풍경을 복원할 수는 없다. 홍명보 선임에는 훨씬 단순한 계산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망하겠어?”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처럼 빅클럽의 주축으로 뛰어본 선수들이 있었고, 그 뒤를 황인범, 이재성, 황희찬을 비롯한 유럽파들이 받쳤다. 대표팀의 주전 대부분이 유럽 무대를 경험한 선수들이었다. 황금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월드컵도 48개국 체제로 확대되면서 조 3위를 해도 32강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이 세계적인 강팀을 줄줄이 잡아야 했던 것도 아니다. 조별리그 세 경기에서 기본만 하면 됐다.


아마 축협도 그렇게 봤을 것이다. 홍명보가 세계적인 명장은 아니어도 K리그 2연패 감독이다. 대표팀도 맡아봤다. 선수들도 좋다. 조 편성도 나쁘지 않다. 설마 32강도 못 가겠어? 이 행복회로가 홍명보 선임을 더 안전한 선택으로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축협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지도자는 조직의 능력을 더해주는 사람만이 아니다. 잘못 뽑으면 이미 있던 능력도 까먹는 존재가 지도자다.


연구소에서도 그렇다. 좋은 과학자 백 명을 모았다고 좋은 연구가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연구바카라임자가 엉뚱한 문제를 붙잡으면 백 명의 과학자가 함께 그것을 풀어야 한다. 여기에는 장비나 연구비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최고급 장비가 있으면 더 정밀하게 실패하고, 연구비가 많으면 더 오래 실패할 수 있다.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을 잘못 뽑으면, 뛰어난 사람들은 그 잘못된 방향으로 더 빨리 달린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좋은 감독은 1+1을 3으로 만든다. 평범한 감독은 2 정도는 만든다. 축협은 홍명보가 적어도 2는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감독은 1+1을 1로 만든다. 이것이 축협의 가장 큰 오판이었다.

xnkhbz.jpg손흥민이 선수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다. 홍명보가 그 사이에 끼어든다. 1+1이 1이 되는 과정.


안전한 선택이란 원래 최악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큰 성공은 못 해도 큰 실패는 하지 않을 사람을 고른다. 그러나 사람을 잘못 고른다면? 안전장치 자체가 위험 요소가 된다. 현상을 유지하라고 뽑은 사람이 현상까지 무너뜨린다.


한국 축구가 잃은 것은 월드컵 성적만이 아니다.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를 동시에 데리고 월드컵을 치를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황금세대라고 불려온 선수들이 가장 좋은 시기에 만났고, 본선 진출권 확대라는 유리한 조건까지 얻었다. 그리고 32강에도 가지 못했다.


실패한 연구과제는 재공고를 내면 된다. 연구바카라임자를 바꾸고, 계획서를 고치고, 사업을 재설계해서 몇 년 뒤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선수에게는 다음 전성기가 없다. 그렇게 황금세대의 월드컵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실패한 뒤 무엇을 하느냐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다른 나라들을 보면 또 마음이 복잡해진다. 독일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위르겐 클롭을 새 감독으로 앉힌다고 한다. 브라질도 16강에서 멈췄다. 그래도 카를로 안첼로티와 다음을 준비한다고 한다. 잉글랜드에서는 여전히 감독 후보로 펩 과르디올라의 이름이 돈다. 실패한 축구 강국들은 다음 감독으로 클롭, 안첼로티, 펩을 이야기한다.


한국도 이제 다음 감독을 찾아야 한다. 과연 홍명보 다음은 누가 맡게 될까. 이민성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hq720.jpg아직 다음 감독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불안한 이름들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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