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에서 다시 쓰기로 했다

by배대웅

이번에도 갈아엎는다. 5%만 더 쓰면 끝나는 바카라을.


2년 전 출간 제의를 받고 써온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 이야기다. 프롤로그만 빼면 원고는 다 썼다. 진행률이 95%쯤 된다. 출판사와 편집회의도 수차례 했고, 9월 출간 일정까지 잡아두었다. 이제 한두 번 더 교열을 보고, 추천사 구걸(?) 좀 하고, 표지 디자인 박으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예 콘셉트부터 바꾸기로 했다. 5%만 채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95%를 다시 하게 됐다. 이 정도면 퇴고가 아니라 회귀다.


사실 갈아엎기는 내 글쓰기 인생에서 드문 일이 아니다. 18년 전 석사학위 논문을 쓸 때부터 조짐이 있었다. 당시 논문을 두세 번은 처음부터 다시 썼다. 첫 바카라 『최소한의 과학 공부』도 출판사의 피드백을 받은 뒤 구조를 완전히 새로 짰다. 두 번째 바카라 『연구소의 승리』는 원고의 60%를 썼을 때 장렬히 산화했다. 연구소별 역사를 차례로 설명하는 구성이 지루한 보고서 같았다. 결국 쓴 원고를 쪼개고 이러저리 합쳐서 세계사의 긴 시간 축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나는 바카라을 쓰는 사람인지 갈아엎는 사람인지 헷갈린다. 『연구소의 승리』를 끝내고 "다음에는 엎더라도 제발 좀 일찍 알아차리자"라고 다짐했었다. 이번에는 마라톤 풀코스를 다 뛰고 나서 “여기가 결승선이 아니라고?” 하는 상황이 됐다. 기록 경신도 참 신박하게 한다.


다만 이전의 갈아엎기와는 차이도 있다. 예전에는 내가 기획을 잘못했었다. 구성이 단조롭거나, 독자 타겟팅을 잘못했거나, 나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다. 이번 원고는 그런 문제가 거의 없었다. 출판사도 내용과 문장에는 좋은 평가를 해주었다.


사고는 원고 밖에서 터졌다. 그새 세상이 바뀐 것이다.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은 평범한 사람도 자기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온라인 게임인이나 학생, 주부와 자영업자처럼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이 삶 속에 글쓰기를 들여놓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문장 기술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왜 써야 하는지, 왜 재능이 없어도 쓸 수 있는지부터 다뤘다. 일하면서 시간을 내는 법, 주제를 찾는 법, 쓰기 위해 읽는 법, 자기 생각을 만드는 법을 지나서, 구성과 문장, 퇴고로 나아갔다. 글쓰기는 몇 가지 요령보다 관심과 독서와 사유가 축적되는 과정이라는 믿음에서였다. 내가 온라인카지노에서 6년 동안 글을 쓰고 바카라 두 권을 내면서 익힌 방법도 그 안에 거의 다 담았다.


그 믿음은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온 원고 역시 한 권의 바카라으로 서점에 꽂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바카라을 쓰는 2년 동안 생성형 AI가 글쓰기의 보조 도구에서 주요 수단으로 급부상했다. 내가 바카라에서 한 장씩 가르치려던 일들을 AI는 한 화면 안에서 몇 초만에 처리한다. 주제를 나누고, 자료를 정리하고, 구조를 짜고, 초고를 만드는 일까지.


나도 그 변화가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래서 집필 막바지에 <AI는 내 글을 대신 쓸 수 있을까>라는 원고를 한 편 추가했다. AI가 잘하는 일과 못하는 일, 글쓰기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다뤘다.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출판사와 원고를 다시 검토하면서 그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AI에 관한 장은 있었지만, AI 시대의 바카라은 아니었다. 한 꼭지를 새로 넣었을 뿐, 바카라 전체는 여전히 사람이 혼자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찾고, 구조를 짜고, 문장을 만드는 과정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AI는 막판에 투입한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이미 완성된 메인 스토리를 바꾸지는 못했다.


출판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대로 나오면 신간이 아니라 구간처럼 보일 수 있어요” 내용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었다. 독자가 바카라에 던지는 질문부터 달라졌다는 뜻이었다.


처음 이 바카라이 세운 질문은 이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도 어떻게 하면 자기만의 글을 쓸 수 있을까?”

이제는 그 앞에 다른 질문이 온다. “AI가 대신 써주는데 굳이 내가 직접 써야 하나?”


이 말을 지나치고 예전처럼 글쓰기의 가치와 방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주제와 자료, 구성과 문장을 다루더라도 AI와 무엇을 나눌 것인지까지 함께 물어야 했다. 기존 원고에 관련 내용을 덧붙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바카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출발점 자체가 바뀐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떻게든 원고를 살려보려 했다. 첫 장을 고치고 AI 원고의 위치도 바꿔봤다. 하지만 새로 쓴 부분이 끝나면 바카라은 다시 AI 이전으로 돌아갔다. 고친 자리는 티가 났고, 살린 문장들은 되려 발목을 잡았다.


바카라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말이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 했는데.” 자료를 이만큼 찾았는데. 원고를 벌써 절반이나 썼는데. 마감이 코앞인데. 지금 바꾸면 너무 힘든데. 모두 사실이라서 더 위험하다. 쓴 분량이 늘어날수록 내용이 좋아서 살리는 것인지, 오래 써와서 놓지 못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게다가 이번에는 거의 다 썼다. 원고를 펼치면 지난 2년 동안 읽은 바카라과 자료, 산바카라하며 떠올린 생각, 새벽까지 붙들고 고친 표현들이 들어 있다. 삭제 버튼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만, 그 한 줄에 들인 시간은 돌려받을 수 없다. 그건 아깝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고생해서 쓴 문장을 버리는 일은 아프다.


그럼에도 독자는 저자가 얼마나 오래 썼는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지금 서점에 놓인 바카라은 지금 독자가 품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2년을 들였다는 사정이 바카라의 유효기간을 연장해주지는 않는다. 그 기준으로 보니 결국 바카라 전체를 다시 써야 했다.


물론 새 원고에서도 기존의 생각을 모두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도, 좋아하는 대상에 몰입해야 자기만의 주제가 생긴다는 생각도 그대로다. 읽기와 사유, 구성과 퇴고의 중요성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것들을 다른 질문 아래에 두어야 한다. 이제는 사람이 직접 해야 할 일과 AI에 맡겨도 되는 일을 함께 따져봐야 한다. 매끄러운 문장이 즉시 나오는 시대에 무엇으로 자기 글을 구분할지도 물어야 한다. 며칠 전 쓴 <인간은 왜 아직도 쓰는가>도 이 고민의 결과였다. 새 원고를 쓰기 전에, 내가 무엇을 다시 물어야 하는지부터 정리해본 글이다.


예전의 독자는 빈 화면 앞에서 한참 동안 막혀 있었다. 지금의 독자는 그 옆에 무엇이든 즉시 채워주는 대화창을 열어둔다. 새 바카라은 그 둘 사이에서 시작될 것이다.


출간 일정은 자연스럽게 밀렸다. 9월 출간은 이미 물 건너갔다. 물 건너간 일정이 어디에 도착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에는 산을 잘못 오른 것 같지는 않다. 정상 부근까지 잘 갔는데, 그사이 지형이 바뀌었다. 기존 원고 중 가져갈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두고 갈 생각이다. 아깝다고 전부 등에 지면 새 길에서도 조난당한다.


글을 오래 쓰면서 완성이라는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 원고는 그대로인데 내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고, 독자가 바뀌기도 한다. 그 셋 중 하나만 움직여도 처음부터 다시 보게 된다. 그래서 탈고라는 단계도 예전만큼 감흥이 없다. 지금의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몇 달 뒤의 내가 같은 결론을 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다시 쓴다. 바카라 한 권을 거의 다 쓰고 나서야 그 바카라이 답해야 할 질문을 제대로 찾았다. 참으로 비효율적인 방식이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발견의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데 있다"라고 했다. 늦었지만 새로운 눈이 생겼다. 그거면 됐다. 원고는 다시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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