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는 바카라들

by배대웅

두 권의 바카라을 탈고했다. 1년 넘게 붙잡고 있던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과 『모르면 미스터리 알면 과학』을 드디어 끝냈다. 물론 “끝냈다”라는 말에는 약간의 양심통이 따른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계약서에 적힌 최종 원고 인도일은 장식입니까?”라고 팩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도 그 날짜를 아름답게 지나쳤다. 역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작가는 마감을 어긴다.


그 결과 출간 일정도 늦어질 듯하다.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은 9월쯤, 『모르면 미스터리 알면 과학』은 내년 초쯤 나올 것 같다. 처음 계획보다는 늦어졌지만, 어쨌든 이제는 내 손을 떠났다. 이쯤 되면 해방감을 느껴도 된다. 학위논문 심사를 마친 대학원생처럼. 혹은 장기 프로젝트를 끝내고 전쟁터가 된 바카라상 앞에 멍하니 앉은 온라인 게임인처럼.


그래서 요즘은 바카라을 읽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좀 이상하다. 바카라을 두 권이나 썼으면 당분간은 바카라 근처에도 안 가고 넷플릭스나 봐야 정상 아닌가. 그런데 막상 원고를 끝내니 손이 또 바카라으로 간다. 나는 바카라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아마 오랫동안 읽고 쓰는 삶에 몸이 길들여진 탓일 것이다. 쓰는 일이 끝나니 이번에는 읽는 일이 슬그머니 빈자리를 차지한다.


바카라을 쓰기 시작한 2022년 이후, 나는 바카라을 거의 읽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서 읽기는 읽었다. 다만 ‘독서’보다는 ‘자료 수색’에 가까웠다. 필요한 대목만 찾아 읽고, 표시하고, 인용하고, 다시 원고로 돌아갔다. 바카라을 읽는 게 아니라 채굴했다. 독서가 아니라 광업이었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역시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한 권을 진득하게 붙잡고 있기가 어렵다. 읽고 싶은 바카라과 읽어야 하는 바카라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래서 세 권을 동시에 읽고 있다. 종목도 다양하다. 소설, 과학사, 에세이. 독서계의 철인 3종 경기다.


일상의 틈새 시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를 읽는다. 아이를 재운 밤에는 김우재의 『과학의 자리』를 펼친다. 그러다 머리가 아파지면 심채경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로 넘어간다. 이쯤 되면 독서보다는 회전초밥이다. 접시가 계속 돈다. 나는 그 앞에서 이것저것 집어 먹고 있다.




먼저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사실 이 바카라은 진작 읽었어야 했다. 나는 『노르웨이의 숲』을 인생 바카라 가운데 하나로 꼽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하루키가 유럽에 머물던 거의 같은 시기에 쓰였다. 그런데 결과물은 꽤 다르다. 『노르웨이의 숲』은 전공투 이후의 공허를 현실 그대로 그려냈고, 『댄스 댄스 댄스』는 그것을 환상 속으로 비틀어 넣었다. 같은 시대를 바라보는데도 표현하는 언어는 달라진 셈이다.


하루키 팬들은 이 바카라을 '쥐 3부작'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솔직히 나는 그런 계보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이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그렇게 매혹적으로 만들었던 시대 감각이, 환상적인 형식을 입으면 어떤 모습이 될까.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는 이쪽이다. 1960년대 전공투 운동 이후의 시대적 공기, 혁명이 지나간 뒤 폐허처럼 가라앉은 공허함, 뭔가 대단한 일이 끝난 것 같은데 정작 나에게 쥐어진 건 아무것도 없는 상태. 『노르웨이의 숲』은 그 감각을 가장 현실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요즘은 조금 다른 의문도 든다. 과연 나는 정말 하루키 팬인가. 내 온라인카지노 최다 출연 작가가 하루키이고, 나도 어디 가면 “하루키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긴 한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나는 하루키의 극히 일부만 좋아하는 것 같다. 『노르웨이의 숲』으로 대표되는, 상실 이후의 허무를 현실의 문법으로 그려내는 하루키. 나는 그 하루키가 좋다. 반면 양 사나이가 나오고, 하늘에 두 개의 달이 뜨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서로 섞이는 하루키 앞에서는 얼어붙는다. 그리고 묻고 싶어진다. “선생님, 이건 대체 뭡니까?”


『댄스 댄스 댄스』가 딱 그렇다. 완전한 리얼리즘 소설은 아니다. 돌핀 호텔도 이상하고, 양 사나이는 더 이상하다. 읽으면서 자꾸 머리를 굴리게 된다. 이게 상징인가? 은유인가? 무의식인가? 아니면 그냥 하루키가 하루키한 것인가? 답을 모르겠다. 하루키는 분명 자기 안에 어떤 질서를 세우고 썼을 텐데, 독자에게 그것을 친절히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이 양반 인터뷰를 봐도 늘 그렇다. “이 부분은 이런 의미인가요?” 하고 물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는 식이다. 세상 쿨하다. 독자는 속이 터진다.


나는 가끔 하루키가 자기 소설의 해답편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거는 이런 의미로 쓴 거고, 저거는 저런 의도로 넣은 겁니다.” 물론 절대 안 쓸 것이다. 그런 걸 쓰는 순간 하루키가 아니니까.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돌핀 호텔은 대체 무엇인가. 양 사나이는 누구인가. 왜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지고, 왜 남겨진 사람들은 계속 춤을 춰야 하는가.


희한하게도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바카라은 계속 읽힌다. 『댄스 댄스 댄스』에는 『노르웨이의 숲』과는 다른 방식의 리얼함이 있다. 현실 같지는 않은데, 어떤 측면에서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장면들이 펼쳐진다. 거대담론은 사라졌고, 자본주의는 휘황찬란해졌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혔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뭔가를 잃어버린 채 계속 움직인다. 아마 이 바카라에서 말하는 춤도 그런 것일 테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됐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멈춰 설 수도 없으니 일단 계속 움직이는 것.


나는 스스로 하루키 팬인지 아닌지 여전히 헷갈린다. 아무래도 나는 하루키 월드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아주 좁은 좌표만 좋아하는 독자인 것 같다. 그런데 또 『댄스 댄스 댄스』를 붙잡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팬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하루키 팬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하루키 팬인지 계속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이 정도면 나만의 독창성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별 걸 다 독창성이라고 우긴다.


두 번째로 읽는 바카라은 김우재의 『과학의 자리』.


이 바카라은 순수한 취미 독서는 아니다. 다음 바카라을 위한 탐색에 가깝다. 과학 바카라을 두 권 써보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학을 쓰는 사람이긴 한데, 과학 자체보다는 과학을 둘러싼 역사와 제도를 더 많이 쓴다. 과학 원리를 설명하는 것도 좋지만, 그 원리가 어떤 시대에 등장했고, 어떤 슬롯적 조건 속에서 받아들여졌고, 인간의 사유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더 궁금해한다.


그렇다면 다음 바카라은 아예 범위를 넓혀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요즘 머릿속에 굴리고 있는 것은 세계사 교양서다. 다만 익숙한 방식의 세계사는 아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일어나고, 제국이 흥망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지는 않다. 내가 드러내려는 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이 인류 문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다. 과학은 단지 스마트폰과 백신과 우주선을 만들어낸 편리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꾼 혁명이었다.


인류는 수백만 년을 살았지만, 문명이 급격히 바뀐 것은 고작 최근 몇백 년의 일이다. 그 변화의 중심에 과학이 있었다. 자연을 신화나 권위가 아니라 관찰과 실험, 수학과 논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 그 태도가 기술을 바꾸고, 산업을 바꾸고, 국가를 바꾸고, 인간의 자기 이해까지 바꾸었다. 그러니까 내가 규명하려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류에게 과학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바카라을 쓸 수 있다면, 내 대표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런 말은 조심스럽다. 작가가 자기 입으로 대표작 운운하는 순간 짜쳐 보인다. 아직 쓰지도 않은 바카라을 두고 대표작이라니, 김칫국도 이 정도면 사골이다. 하지만 솔직히 그런 욕심이 있다. 규모 있고, 선 굵고, 오래 남을 수 있는 바카라을 써보고 싶다는.


지금까지 내 바카라 작업은 모두 출판사가 먼저 제안하고, 내가 그 기획을 받아서 쓰는 방식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해보고 싶다. 내가 먼저 구상하고, 충분히 준비한 다음, 이 기획에 맞는 출판사를 찾아가는 방식. 그러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그냥 “과학이 인류 문명을 바꿨습니다!” 하고 외치는 정도로는 안 된다. 그건 유튜브 썸네일이지 바카라의 논리가 아니다. 과학혁명, 계몽주의, 산업혁명, 제국주의, 민주주의, 전쟁까지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엮어야 한다. 이런 바카라은 아이디어 하나 떠올랐다고 바로 쓸 수 없다.


『과학의 자리』는 그 준비 과정에서 읽는 바카라이다. 이 바카라은 특히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과학이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보여준다. 과학이 그저 유용한 지식만이 아니라, 슬롯를 재설계하려는 지적 운동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자연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 슬롯도 합리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믿음이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동력이 되었다. 이 지점은 내가 구상하는 다음 바카라에서도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과학은 실험실 안에만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권위와 전통을 의심하고, 세계를 근본부터 다시 묻기 시작한 더 넓은 자리에도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당장 시작하기 어렵다. 당분간은 천천히 읽고, 메모하고, 구조를 잡아보려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원고보다 질문이다. “인류에게 과학은 과연 무엇이었나?” 이 질문 하나가 바카라 한 권을 끝까지 끌고 갈 힘이 있는지, 먼저 그걸 확인해 보고 싶다.


세 번째 바카라은 심채경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이 바카라도 필요에 의해 읽고 있다. 이달 말 알라딘이 운영하는 만권당TV 유튜브, 그중에서도 <심채경의 과학감성>에 출연하기로 했다. 주제는 『연구소의 승리』다. 진행자 심채경 님이 바카라을 읽고 직접 섭외를 요청했다고 들었다. 감사한 일이다. 다만 이런 일은 늘 감사와 부담이 세트로 온다. 누가 내 바카라을 좋게 읽었다고 하면 기분은 좋다. 그런데 막상 만나려고 하면 "바카라은 재미있었는데 사람은 노잼이네."라는 평가를 받을까 봐 긴장하게 된다.


그래서 예습하는 기분으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고 있다. 예전에 <윤고은의 EBS 북카페>에 출연했을 때도 그랬다. 출연 전에 윤고은 님의 『빈틈의 온기』를 미리 읽고 갔다. 진행자가 어떤 문장으로 세상을 표현하는지 알고 가면 대화의 출발점이 달라진다. 초면인데도 대화의 반은 이미 끝내고 만나는 느낌이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과학자의 에세이다. 아직 많이 읽지는 못했어도 느낌은 좋다. 과학 지식을 내세우기보다 과학자로 살아가는 감각을 묘사한다. 천문학은 스케일이 굉장히 큰 분야다. 별, 달, 행성, 우주. 단어만 봐도 인간이 작아진다. 그런데 이 바카라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 연구자라는 직업의 생활감, 관찰하는 사람의 마음, 과학과 일상의 어긋남 같은 지점들.


읽다 보니 호프 자런의 『랩 걸』도 떠오른다. 『자기만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인용했던 바카라이다. 『랩 걸』이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의 삶을 보여주었다면,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별을 연구하는 사람의 일상을 보여준다. 대상은 다르지만 도착하는 곳은 비슷하다. 좋은 과학 에세이는 지식만 남기지 않는다. 연구실에서 살아가는 사람, 실패와 기다림, 호기심과 집요함 같은 것도 남는다. 식물이든 별이든 오래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사람에게 도착하는 듯하다.




아무튼 요즘 나는 이렇게 세 권을 읽고 있다. 하나는 내가 정말 하루키를 좋아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하나는 다음 바카라의 가능성을 가늠하기 위해, 하나는 유튜브 출연 전에 진행자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 이쯤 되면 독서도 참 순수하지 않다. 예전 같으면 “그냥 읽고 싶어서 읽는다”라고 말했을 텐데, 요즘은 바카라을 펼칠 때마다 뒤에 목적이 줄줄이 달려온다. 감상, 공부, 기획, 홍보, 예습. 독서의 멀티버스다.


어쩌면 이게 지금 나에게 맞는 독서인지도 모른다. 완전히 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만 하는 것도 아닌 상태. 노는 듯 준비하고, 준비하는 듯 딴짓하는 일상. 바카라을 다 끝냈으면 좀 신나게 놀 법도 한데, 나는 다시 바카라을 읽고 있다. 이게 성실함인지, 중독인지, 혹은 그냥 직업병인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카라을 쓰고 나면 바카라을 읽고 싶어진다. 바카라을 읽다 보면 다시 뭔가를 쓰고 싶어진다. 탈고를 했는데도 머릿속은 아직 퇴근을 안 한 모양이다. 물론 집안에 이 바카라 저 바카라 늘어놓고 바꿔가면서 읽다가 진도는 별로 못 나가는 건 안 자랑이다. 바카라 세 권 분량이 만만치 않은데, 이 속도라면 완독보다 새 바카라을 또 사는 일이 먼저 올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랜만에 바카라에 집중하는 이 시간이 좋다. 원고에 필요한 부분만 칼로 도려내듯 읽는 게 아니라, 한 권의 바카라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따라가 보고 있다. 그러다 보면 하루키의 이상한 호텔에도 들어가고,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자들도 만나고, 별을 보지 않는 천문학자의 문장 앞에도 앉게 된다.


탈고 후의 여유라고 하기에는 조금 바쁘고,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쉬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요즘 나는 바카라을 읽고 있다. 아마 조만간 또 바카라을 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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