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사건과 클로드 모네의 고뇌
카톡 프로필 사진, SNS 감성 카페의 벽면, 미술관 기념품점의 엽서 세트.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자주 마주치는 서양화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일 것이다. 물 위에 떠있는 연꽃잎, 화면에 번지는 푸른빛과 초록빛, 구름과 나무가 비친 잔잔한 수면. 현실에는 없지만 누구나 그리워하는 이상적인 오후가 캔버스 위에 펼쳐져 있다.
모네 하면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빛의 화가. 수련, 루앙 대성당, 런던의 안개 속에서 새로운 색채를 발견한 관찰자.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순간을 화폭에 옮긴 인상주의의 거장.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세상의 소음마저 잠시 멀어지는 것 같다. 인간의 지저분한 싸움들은 그 연못가에 끼어들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련의 연못 밖으로 나오면 전혀 다른 모네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가장 평화로운 화가로 기억하는 모네는, 사실 프랑스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정치적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를 지지했고,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지식인 선언에 이름을 올렸다. 평생 붓만 들고 살았을 것 같은 이 화가는 국가와 여론이 한 사람을 짓밟는 장면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모네의 수련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세상과 무관한 아름다운 정원이었을까, 아니면 슬롯의 가장 깊은 분열을 온몸으로 겪은 화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장소였을까?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프랑스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에 군사 기밀을 넘겼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었다. 이것이 사건의 핵심이었다. 당시 프랑스 슬롯에는 보불전쟁 패배 이후 독일에 대한 적개심, 군부에 대한 맹목적 신뢰, 그리고 반유대주의가 뒤엉켜 있었다. 드레퓌스는 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손쉬운 희생양이 되었다.
재판은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증거는 부실했고, 필적 감정은 의심스러웠으며, 피고인에게 공개되지 않은 자료까지 동원되었다. 군부와 보수 언론은 이미 결론을 정해놓고 있었다. 드레퓌스는 반역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계급장을 뜯기고 칼을 부러뜨리는 굴욕 의식을 치른 뒤 유배되었다.
사건은 그대로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균열이 생겼다. 그때부터 사건은 사법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가 되었다. 군부와 사법부는 오류를 덮는 쪽을 택했다. 한 사람의 무죄보다 군의 명예가 중요했고, 진실보다 국가의 체면이 지켜져야 했다.
그 침묵을 깨뜨린 사람이 에밀 졸라였다. 1898년 1월 13일, 졸라는 일간지 <로로르> 1면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제목은 짧고 강렬했다. “나는 고발한다.” 졸라는 군부와 사법부가 어떻게 드레퓌스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는지 하나하나 지목했다. 이 글은 문학 작품이 아니라 정치적 폭발물이었다. 졸라는 자신이 명예훼손으로 기소될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재판을 받고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 글은 프랑스를 갈라놓았다. 한쪽에는 드레퓌스의 무죄와 재심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군대와 국가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건은 현대적 의미의 '지식인'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1898년 1월 14일, 학자와 작가, 언론인, 예술가들이 드레퓌스 재심을 요구하는 선언문에 서명하자 보수 언론은 그들을 비꼬아 '지식인들(Intellectuels)'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조롱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이름은 살아남았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공적 문제에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훗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 즉 슬롯참여적 지식인의 전통도 상당 부분 이 경험 위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명단에 뜻밖의 이름이 있었다. 클로드 모네였다.
모네와 졸라의 인연은 오래되었다. 졸라는 젊은 시절부터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한 드문 문인이었다. 당시의 인상주의는 지금처럼 달력과 엽서에 박제된 대중적 명화가 아니었다. 살롱에서 조롱받고, 언론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던 전위적 회화였다. 졸라는 그런 화가들을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혁신적 예술가로 보았다. 모네에게 졸라는 유명한 소설가 이전에, 가난하고 불안했던 시절 자신들의 그림을 이해해준 사람이었다.
모네는 드레퓌스 재심을 요구하는 지식인 선언에 서명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이런 선택은 군부와 보수 언론, 민족주의 여론 전체에 맞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돌아왔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슬롯만 갈라놓은 것이 아니었다. 한때 인상주의의 깃발 아래 모였던 화가들마저 서로 다른 진영으로 흩어졌다.
모네와 카미유 피사로, 메리 카사트, 폴 시냐크 등은 드레퓌스 편에 섰다. 반면 에드가 드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등은 반드레퓌스 진영에 속했다. 특히 유대인이었던 피사로에게 이 갈등은 단지 정치적 의견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친구들의 입에서 자신을 향한 혐오가 흘러나오는 참담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드가의 반유대주의는 악명이 높았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피사로와 사실상 절연했다. 르누아르 역시 유대인을 향한 노골적인 편견을 드러냈다. 인상주의의 따뜻한 색채 뒤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는 사실은 당혹스럽다. 같은 전시를 열고, 같은 시대의 미술을 바꾸어온 사람들이 한 사건을 계기로 서로 다른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모네가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는 일기장에 자기 감정을 길게 적어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프랑스 슬롯의 가장 뜨거운 논란 앞에서 입장을 밝힌 그의 뜻은 분명했다. 흔히 생각하듯 철학자나 문학가만이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화가도 지식인이 된다. 붓을 든 사람도 시대 앞에서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렇다면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남는다. 드레퓌스 사건은 모네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세간에는 모네가 드레퓌스 사건에 충격을 받아 "더 이상 프랑스의 풍경을 그리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지만 이는 모네의 발언으로 직접 확인되지 않는다. 역사에는 너무나 멋진 나머지 사실처럼 굳어버린 문장들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할머니에게 설명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가 대표적이다. 모네의 이 선언 역시 그런 종류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림을 보면 미묘한 변화가 드러난다. 드레퓌스 사건 이전의 모네는 프랑스의 풍경을 자주 그렸다. 노르망디 해안, 에트르타의 절벽, 센강, 생라자르역, 루앙 대성당. 특히 루앙 대성당 연작은 프랑스 고딕 건축의 상징을 시간과 빛의 변화 속에서 반복해 그린 역작이었다. 모네가 의도적으로 국가주의적 그림을 그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포착한 풍경들이 프랑스라는 공간의 기억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그의 시선은 조금 달라진다. 노르웨이의 설경을 그렸고, 이어 런던의 템스강과 국회의사당, 워털루 다리, 채링크로스 다리를 그렸다. 프랑스의 대성당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화가는 이제 이국의 안개 속에서 사물의 윤곽이 흩어지는 장면에 몰두했다. 그리고 프랑스로 돌아온 뒤에는 지베르니의 정원과 연못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물론 이 변화를 드레퓌스 사건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모네는 이미 1883년부터 지베르니에 정착해 있었고, 수련 연작도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작업이었다. 따라서 후기 작품 세계 전체를 정치적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은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그럼에도 시기의 우연한 겹침은 눈길을 끈다. 프랑스 슬롯가 깊은 분열을 겪던 바로 그 무렵, 모네는 자신의 정원을 점점 더 거대한 회화적 세계로 바꾸고 있었다. 1898년 그는 연못 풍경을 방 전체를 감싸는 장식화로 확장할 구상을 했다. 이는 훗날 오랑주리 미술관의 대형 <수련> 연작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된다.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대목은 해석이 갈린다. 재키 울슐라거는 드레퓌스 사건 이후 모네가 프랑스의 공적인 장소를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면 폴 헤이즈 터커는 이러한 주장에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서, 런던 연작은 드레퓌스 사건 이후 모네가 프랑스 미술의 우위를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려 한 결과일 수 있다고 본다. 제임스 루빈도 후기의 모네를 당대의 전쟁, 민족주의, 정치적 분열과 함께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니 안전한 결론은 이 정도일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모네에게 수련을 그리게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드레퓌스 사건을 겪은 모네가 왜 점점 연못과 물, 반사와 수련이 만들어내는 작은 세계로 들어갔는지 묻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다.
수련은 현실을 모르는 노화가의 한가로운 취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세상의 소란을 모두 제거한 뒤 남은 풍경이었다. 지평선도 없고, 하늘도 직접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물 위에 비친 하늘과 나무, 그리고 수면 위에 떠있는 꽃잎들뿐이다. 세계는 연못의 표면으로 압축된다. 거대한 풍경을 그리던 화가의 시선은 점점 더 좁고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많은 사람이 해석하듯 그곳은 도피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피라는 말은 어딘가 수동적이다. 세상이 싫어서 등을 돌린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모네가 정말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너진 현실을 피해 숨기보다,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다시 만들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슬롯를 갈라놓았고, 평생을 함께했던 동료들마저 서로 등을 돌렸다. 그런 시대에 모네가 좇은 것은 정치도 이념도 아니었다. 아침마다 달라지는 빛,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꽃과 나무였다.
인간의 세계는 소란스러웠으나 자연은 그렇지 않았다. 군중의 함성이 아무리 커도 연못 위에는 다음 날 다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모네는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이 광기에 휩싸일수록 그의 시선은 더 낮아졌다.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했지만, 모네는 수면 위에 내려앉는 빛을 그리고 있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독일이 항복한 다음 날, 모네는 친구 조르주 클레망소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이 완성한 수련 그림을 프랑스에 기증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이 장면은 중요하다. 모네는 끝내 현실 밖으로 사라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때도 침묵하지 않았고, 전쟁이 끝났을 때도 자기 방식으로 조국에 응답했다. 다만 그의 언어는 화가답게 연설이나 선언이 아닌 그림이었다.
그래서 모네의 수련은 흔한 풍경화로 보이지 않는다. 그 평화로운 연못은 프랑스가 정치적 광기로 몸살을 앓던 시대를 건너온 화가의 마지막 장소였다. 수련 속에는 물론 드레퓌스 사건이 직접 그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예술은 원래 그런 방식으로 시대를 품는다. 사건을 재현하는 대신, 그 사건을 겪은 인간의 마음을 남긴다.
과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다.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은 17세기 유럽의 종교와 정치 질서 밖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물리학도 20세기의 전쟁과 망명과 무관하게 읽히지 않는다. 철학자의 개념도, 과학자의 이론도, 화가의 색채도 모두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다음에 모네의 수련을 보게 된다면, 잠시 그림 바깥의 세계를 떠올려도 좋겠다. 그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인상주의의 낭만적 황금기가 아니었다. 거리에서는 드레퓌스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신문들은 매일같이 서로를 공격했다. 평생을 함께했던 화가들마저 서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 모든 소음 끝에 모네는 자기 정원의 연못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