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는 좀비 같은 만화다. 연재가 30년 전에 끝났는데도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져 나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국 제패’라는 클리셰 대신 ‘중도 탈락’이라는 파격적인 마침표로 끝났기 때문이다. 남겨진 복선들은 팬들에게 무궁무진한 떡밥을 남겼고, 독자들은 늘 “그 뒤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묻게 되었다.
하지만 『슬램덩크』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를 미완의 여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진짜 강력한 건 경기 묘사의 밀도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농구를 누가 더 많이 득점하느냐의 단순한 싸움으로 그리지 않았다. 『슬램덩크』에서는 선수 구성, 포지션별 강점과 약점, 팀의 색깔, 전술적 상성이 경기 흐름을 바꾼다. 북산이 왜 해남에게 졌는지, 왜 능남을 이겼는지, 왜 산왕에 대역전할 수 있었는지가 모두 농구적으로 설명된다. 이 작품은 청춘 만화인 동시에 매우 뛰어난 농구 만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농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슬램덩크』를 다시 읽을 때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어? 이 타입, 요즘 NBA에 있잖아?” 물론 캐릭터를 실제 선수와 비교하는 놀이는 예전에도 있었다. 강백호는 데니스 로드맨, 서태웅은 마이클 조던, 채치수는 데이비드 로빈슨이라는 식이다. 이노우에 역시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보다는 NBA 선수들의 플레이스타일을 캐릭터 설계의 재료로 활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건 반대 방향이다. 연재 당시의 선수와 닮은 캐릭터가 아니라, 연재가 끝난 뒤 더 비슷한 실제 선수가 나타난 경우들이다. 1990년대에는 다소 만화적 과장처럼 보였던 유형이 10년, 20년 뒤 NBA에서 현실이 되었다.
특히 지금 보면 『슬램덩크』는 현대 농구의 핵심인 ‘포지션리스(Positionless)’의 스멜이 진하게 풍긴다. 센터인데 드리블을 하고, 포워드인데 경기를 조립하며, 가드처럼 공을 다루는 빅맨이 등장한다. 포지션 구분이 뚜렷했던 1990년대 NBA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노우에가 미래를 예언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농구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창작자로서, 코트에서 가능한 플레이들을 캐릭터에 최대한 다양하게 담아내려 했다. 더 강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현실보다 한 발 앞선 선수 유형들을 적극적으로 실험한 셈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의 일부가 훗날 NBA에서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슬램덩크』를 읽어보려 한다. “이 캐릭터의 모델이 누구였을까?”가 아니라 “이 캐릭터는 나중에 어떤 실제 선수로 현실화됐을까?”라는 질문이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펼쳐보는 농구 덕후의 평행이론이다. 좋은 스포츠 만화는 명장면만 남기지 않는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새 선수, 새 전술, 새 시대와 계속 연결된다. 산왕전 이후에도 『슬램덩크』가 끝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슬램덩크』 팬이라면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정환이다. 실제로 국내 농구 팬들은 오래전부터 이정환을 ‘릅정환’이라고 불러왔다. NBA에서 한 시대의 지배자였던 르브론 제임스와 놀라울 정도로 닮았기 때문이다.
이정환은 유독 손해 보는 캐릭터다. 작중 위상만 보면 전국구 최강자 반열인데,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늘 윤대협이나 정우성 같은 천재들에게 밀린다. 정우성처럼 한 장면만으로 압도하는 화려함도 없고, 윤대협처럼 천재 특유의 자유분방함도 없다. 하지만 농구적으로 뜯어보면 『슬램덩크』에서 가장 현대적인 선수 중 한 명이다.
포지션은 포인트가드다. 그런데 플레이는 전통적인 가드가 아니다. 그는 화려한 패스나 정교한 세트오펜스로 경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대신 폭발적인 돌파와 강한 몸싸움으로 수비를 무너뜨린다. 상대 수비수가 몇 명이 달라붙든 밀고 들어가고, 인사이드에서 득점을 만들어내며, 리바운드와 속공 전개까지 바카라임진다. 한마디로 ‘포인트가드의 시야를 가진 파워포워드’다.
르브론 제임스 역시 같은 방식으로 NBA를 지배했다. 특히 마이애미 히트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시절이 그랬다. 르브론이 돌파를 시작하면 수비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을 더 붙여야 한다. 그렇다고 도움 수비를 보내면 외곽에서 기다리던 레이 앨런, 카일 코버, 케빈 러브 같은 슈터들에게 오픈 찬스가 생긴다. 수비가 슈터를 막으러 나가면 다시 골밑이 열린다. 르브론의 공격은 상대 수비 전체를 흔드는 전술의 출발점이었다.
해남의 공격도 정확히 같은 구조다. 이정환이 페인트존으로 돌진하면 상대 수비는 반드시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대로 두면 득점을 허용한다. 그렇다고 여러 명이 달라붙으면 신준섭 같은 슈터가 비게 된다. 현대 농구에서 말하는 '드라이브 앤 킥(Drive and Kick)'의 전형적인 형태다.
더 흥미로운 건 둘 다 돌파 이후의 선택지가 똑같다는 점이다. 수비가 늦으면 그대로 레이업이나 골밑슛으로 마무리한다. 수비가 몰리면 패스가 나간다. 혹은 수비가 막아도 몸빵으로 버티며 득점을 만들어낸다. 『슬램덩크』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정환은 앤드원을 참 쉽게 만든다. 몸싸움을 버텨내면서 슛을 성공시키고 추가 자유투까지 얻어낸다. 이건 전성기 르브론의 가장 강력한 시그니처 무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사실 둘 다 전형적인 득점왕 타입은 아니다. 경기 내내 공을 독점하거나 무리하게 슛을 던지는 선수들도 아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경기가 끝나고 박스스코어를 보면 모든 지표의 상위에 이름이 있다. 득점, 어시스트, 리바운드, 스틸, 그리고 팀 승리. 상대 입장에서는 가장 짜증나는 유형이다. 플레이가 막 화려해 보이지는 않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경기 전체를 지배당해 있다.
그야말로 감독이 작전판 위에 그리고 싶어 하는 모든 플레이가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코트 위에는 다섯 명이 뛰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이 경기의 구조와 양상을 바꾼다. 선수라기보다 하나의 시스템에 가깝다.
윤대협은 『슬램덩크』의 밸런스 파괴자다. 작가 이노우에조차 "너무 완벽한 캐릭터라서 정이 가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럴 만도 하다. 윤대협은 농구 선수에 필요한 재능들을 거의 전부 가지고 있다. 큰 키, 뛰어난 볼 핸들링, 탁월한 패싱 센스, 폭발적인 득점력, 넓은 시야, 침착한 경기 운영. 심지어 멘탈까지 좋다. 보통은 하나쯤 부족한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이 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윤대협은 특정 포지션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공식 포지션은 스몰포워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포인트가드를 맡기도 하고, 에이스 스코어러가 되기도 한다. 팀의 공격이 막히면 직접 1대 1로 해결하고, 반대로 동료들이 살아나야 할 때는 적극적으로 패스를 뿌린다. 변덕규와 황태산이라는 강력한 공격 옵션을 살려주는 플레이메이커이면서도, 본인이 공격 모드로 들어가면 30점 정도는 우습게 박는 해결사다.
연재 당시에는 이런 선수를 비교할 대상이 마땅치 않았다. 장신 포인트가드라는 이유로 매직 존슨이 언급되기도 했었다. 다만 작중 윤대협이 온전히 포인트가드로 뛴 건 딱 한 경기라서, 매직과 비교하기에는 샘플이 부족하다. 그러다 30년이 지나서야 그보다 훨씬 더 비슷한 선수가 나타났다. 바로 루카 돈치치다.
돈치치는 NBA를 대표하는 올라운드 플레이메이커다. 201cm의 장신이지만 대부분의 공격이 그의 손에서 시작된다. 포인트가드처럼 경기를 조립하고, 스몰포워드처럼 득점하며, 필요하면 리바운드까지 바카라임진다. 최근 몇 년간 돈치치는 평균 30점 안팎의 득점과 8개 이상의 리바운드, 어시스트를 동시에 기록 중이다. 특히 2023-24 시즌에는 33.9 득점, 9.2 리바운드, 9.8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NBA에서 가장 많은 일을 혼자 해내는 선수가 되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둘 다 운동능력으로 승부하는 유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정환과 르브론이 탱크처럼 밀고 들어가 상대를 찍어 누른다면, 윤대협과 돈치치는 훨씬 영리한 방식으로 경기를 지배한다. 둘 다 엄청나게 빠르지도 않고 점프력이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다. 그런데 막상 수비가 따라가지 못한다.
비밀은 템포 조절 능력에 있다. 많은 분석가가 돈치치의 가장 큰 무기로 '감속(Deceleration)'을 꼽는다. 무조건 빠르게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움직이다가 원하는 순간 정확히 멈추는 능력이다. 수비수가 반응하는 타이밍을 역이용해 한 박자 늦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치치는 마치 슬로 모션으로 뛰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수비를 와장창 무너뜨린다.
윤대협도 비슷하다. 그는 경기에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상대가 조급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수비가 움직이는 순간 빈 공간을 찌른다. 북산전에서 보여준 침착한 경기 운영이나, 더블팀이 들어오는 순간 반대편 동료를 살려주는 패스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힘보다는 BQ(농구 IQ)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선수다.
그래서 윤대협과 돈치치는 오해하기 딱 좋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둘 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뛰지도 않고, 온몸으로 상대를 압박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경기가 끝나고 보면 가장 많은 득점과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올려놓고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를 남들보다 쉽게 풀어버리는, 재수 없는 전교 1등 같다.
이러니 농구에 진심인 이노우에가 윤대협에게 정이 가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농구를 너무 잘해서, 농구가 어려워 보이지 않는 선수. 설렁설렁 뛰는 것 같은데도 경기가 끝나면 MVP급 성적을 찍어놓은 선수. 최근 NBA에서 그런 재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선수가 루카 돈치치다.
정우성은 『슬램덩크』 세계관 최강의 선수다. 팬들의 평가는 조금 갈리기도 한다. “만약 『슬램덩크』 캐릭터들이 드래프트에 나오면 누구를 1순위로 뽑을까?”라는 질문에 정우성보다는 신현철을 꼽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아마 센터는 기본이고 파워포워드, 스몰포워드까지 커버하는 그 활용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순수한 개인 기량만 보면 정우성을 따라올 선수는 없다. 작중에서도 그는 명백하게 '전국 최강 플레이어'라고 공식화된다. 인터하이에 집결한 전국의 그 수많은 재능충들 중에 이 사실에 태클을 거는 이는 하나도 없다.
재미있는 건 정우성이 의외로 단순한 캐릭터라는 점이다. 윤대협처럼 경기를 설계하지도 않고, 이정환처럼 팀 전체를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의 역할은 명확하다. 공을 잡는다. 그리고 림에 집어넣는다. 말은 쉬워 보이는데 그걸 아무도 못 막는다.
정우성은 득점 루트에 제한이 없다. 1대 1은 도진우 감독 피셜 대학에도 막을 자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다. 골밑에서 몸싸움을 이겨내고 득점을 따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그러다가 수비수가 조금만 떨어진다 싶으면 바로 미드레인지 점퍼나 3점슛을 꽂아 넣는다. 보통 선수들은 몇 가지 무기를 중심으로 경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정우성은 코트 어디에서든 득점이 가능한 굇수다.
지금의 NBA를 보면 자연스럽게 한 선수가 떠오른다. 케빈 듀란트다. 듀란트는 흔히 '3레벨 스코어러(Three-Level Scorer)'라고 불린다. 림 근처, 미드레인지, 3점 라인 밖. 코트의 모든 구역에서 효율적으로 득점할 수 있다는 뜻이다.
듀란트가 무서운 건 슛을 잘 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원래 저 키로 저런 플레이를 하면 안 되는 선수다. 신장이 무려 210cm에 가까운데 이 정도면 보통 센터나 파워포워드를 맡아야 한다. 그런데 듀란트는 가드처럼 드리블하고, 크로스오버를 하고, 풀업 점퍼를 던진다. 작은 선수는 높이로 찍어 누르고, 큰 선수는 스피드와 볼 핸들링으로 벗겨낸다. 그래서 수비 입장에서는 답이 없다.
정우성도 정확히 같은 난제를 상대에게 안긴다. 작중 정우성의 키는 186cm로 가드/포워드로서 작은 편이 아니다. 북산은 채치수와 강백호라는 190cm대 트윈 타워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우성은 골밑으로 파고들어 이들을 상대로 쉴 새 없이 득점을 따냈다.
대표적인 장면이 채치수와 강백호 사이를 가르며 성공시킨 더블 클러치다. 공중으로 떠오른 뒤 수비수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몸을 비틀어 슛 궤적을 바꾸는 기술이다. 전성기 마이클 조던의 하이라이트 필름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플레이이기도 하다. 수비 입장에서는 분명히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공은 이미 다른 궤적으로 림을 향하고 있다.
게다가 정우성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수비수와 맞부딪혀 공중전을 벌이는 대신, 아예 그걸 피해버리는 기술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일명 '개똥슛'이다. 매우 짜쳐 보이는 이름과 달리 고난도의 기술이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수비수의 손끝을 넘기는 플로터(Floater) 혹은 스쿱 샷(Scoop Shot)의 일종이다. 더블 클러치가 공중에서 수비를 속인다면, 개똥슛은 수비수가 점프하기도 전에 승부를 끝내 버린다. 강백호 같은 블로커가 최고점에 도달하기 전에 공이 먼저 림을 향해 떠오르기 때문이다.
듀란트의 주무기는 미드레인지 점퍼고, 정우성의 개똥슛은 플로터에 가깝다. 기술만 놓고 보면 전혀 다르다. 하지만 둘 다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 어떻게 하면 블록을 피하면서도 안정적으로 득점할 수 있는가. 듀란트는 압도적인 높이로, 정우성은 절묘한 궤적으로 해결한다.
상대에게 미스매치를 강요한다는 점에서도 정우성과 듀란트는 꼭 닮았다. 작은 수비수를 붙이면 슛을 막을 수 없고, 큰 수비수를 붙이면 발이 따라가지 못한다. 상대 감독은 늘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포기해도 결국 실점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우성은 상대를 압도하는 걸 넘어 아예 체념하게 만든다. 실제로 북산은 산왕을 꺾었지만, 경기 내내 "정우성을 막았다"라는 느낌은 한 번도 주지 못했다.
농구에서 가장 무서운 공격수는 골을 잘 넣는 선수가 아니다. 상대에게 "도대체 어떻게 막아야 하지?"라는 절망감을 느끼게 만드는 선수다. 정우성과 듀란트가 딱 그런 유형이다. 문제가 주어지면 그에 맞는 답을 제시해야 하는데, 수비 입장에서는 고를 수 있는 옵션이 없다.
신현철은 『슬램덩크』에서 가장 현대적으로 보이는 센터다. 『슬램덩크』가 연재되던 1990년대는 이른바 '4대 센터'의 시대였다. 샤킬 오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이 NBA를 씹어먹던 시절이다. 당시 농구에서 센터란 역할이 분명한 존재였다. 골밑을 지키고, 리바운드를 잡고, 몸싸움으로 상대를 밀어붙여야 했다. 『슬램덩크』 속 채치수, 변덕규, 고민구, 김판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골밑 장악력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고, 기술은 그다음 문제였다.
그런데 신현철은 근본부터 다른 존재였다. 분명 센터인데 드리블을 한다. 미드레인지 슛도 던진다. 상대를 등지는 포스트업이 아니라, 상대를 바라보는 페이스업으로 공격을 시작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공을 운반하기도 한다. 이건 요즘 농구 용어로 말하면 스트레치 빅맨(Stretch Big Man)이다. 골밑에만 머무르지 않고 외곽까지 수비를 끌어내서 공격을 펼치는 유형이다. 한때는 덕 노비츠키나 크리스 보쉬 같은 스트레치 빅맨들이 특별한 사례로 여겨졌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이런 유형이 빅맨의 표준에 가까워졌다.
북산전에서 신현철은 채치수를 상대로 스트레치 빅맨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공격 옵션을 선보인다. 골밑 포스트업은 기본이다. 하이포스트 근방에서도 슛을 던지고, 드리블로 수비를 흔들고, 정우성과 최동오에게 패스를 연결한다. 채치수는 센터를 상대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가드와 포워드와 센터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재의 NBA에서는 앤서니 데이비스가 이와 겹쳐 보인다. 데이비스 역시 전형적인 센터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골밑에서 리바운드와 블록슛을 바카라임지는 동시에, 페이스업 상황에서 직접 돌파를 시도하고, 픽앤롤과 픽앤팝을 자유자재로 소화한다. 센터와 파워포워드의 경계를 넘나들며, 때로는 마무리 역할을 맡고 때로는 공격 전개의 연결고리가 되면서, 코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둘은 빅맨임에도 움직임이 상당히 가볍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통 센터는 방향 전환이 느리고 활동 범위가 제한된다. 하지만 신현철과 데이비스는 골밑에서 힘으로 싸울 수도 있고, 외곽에서 기술로 승부할 수도 있다. 이러니 상대 입장에서는 수비 기준점을 잡기가 어렵다. 큰 선수처럼 막으면 스피드가 문제가 되고, 작은 선수처럼 막으면 높이가 문제가 된다. 이런 '가드의 기술을 가진 센터'는 『슬램덩크』 연재 당시에는 개념조차 생소했다.
그런데 더욱 소름 돋는 공통점은 성장 과정이다. 신현철은 1학년 때만 해도 165cm의 가드였다. 이후 키가 급격히 크면서 포워드를 거쳐 센터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키만 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가드 시절 익혔던 드리블, 볼 핸들링, 슈팅 기술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센터의 신체조건에 가드의 기술을 가진 특이한 선수가 되었다.
앤서니 데이비스의 성장 과정도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그 역시 고등학교 초반까지는 가드에 가까운 선수였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20cm 가까이 키가 자라며 순식간에 빅맨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가드로 플레이하면서 익힌 드리블과 슈팅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거대한 몸에 외곽 기술을 장착한 NBA 최고의 빅맨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신현철과 데이비스의 평행이론은 다른 세 명과는 다르다. 이정환과 르브론, 윤대협과 돈치치, 정우성과 듀란트는 플레이스타일이 닮았다. 신현철과 데이비스는 인생 자체가 닮았다. 1990년대의 『슬램덩크』와 2020년대 NBA를 잇는 가장 놀라운 연결고리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비교는 농구 덕후의 즐거운 망상에 가깝다. 이노우에가 르브론 제임스나 루카 돈치치의 등장을 예견하고 『슬램덩크』를 그린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들 대부분은 연재가 끝나고 한참 뒤에야 NBA 무대에 등장한 선수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평행이론이 계속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노우에는 선수 몇 명을 간지나게 그리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농구라는 스포츠 안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역할과 전술적 조합을 집요하게 탐구했다. 득점하는 선수, 경기를 조립하는 선수, 포지션의 경계를 허무는 선수, 가드의 기술을 가진 센터. 그래서 『슬램덩크』의 캐릭터들은 특정 시대의 유행에 묶여 늙어버리지 않는다.
실제로 이 만화를 다시 펼쳐 보면 종종 놀라게 된다. 분명 1990년대 고교농구 이야기인데, 어떤 장면은 지금 NBA 전술 클립처럼 보인다. 윤대협은 장신 플레이메이커의 시대를 먼저 살았고, 신현철은 현대식 빅맨의 프로토타입처럼 움직인다. 이정환과 정우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시간이 갈수록 희한하게 최신 만화가 되어 간다. 30년 전 작품인데도 새로운 선수가 등장할 때마다 재소환된다. 웬만한 스포츠 만화는 완결과 함께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슬램덩크』는 아직도 현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