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고흐에 미쳤을까?

버블경제와 잃어버린 30년의 역설

by배대웅

1987년 3월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장. 전 세계 미술계가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일본의 야스다해상화재보험이 빈센트 반 고흐의 1888년작 <해바라기>를 3,99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58억 엔)에 낙찰받은 것이다. 미술품 경매 사상 역대 최고가 기록이었다. 서구 언론들은 “아시아의 졸부들이 서양 문화의 정수를 돈으로 쓸어 담고 있다”라며 경계심과 조소를 동시에 보냈다. 그들은 내심 일본의 경제력은 인정해도 문화적 권위까지는 내주고 싶지 않아 했다. 그만큼 이 사건은 세계 패권의 무게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상징처럼 읽혔다.


하지만 일본 자본의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이 기록은 불과 3년 뒤 또 다른 일본인에 의해 가볍게 더블스코어로 경신된다.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열린 경매는 그야말로 광기의 현장이었다. 숨 막히는 호가 경쟁 끝에 낙찰봉이 두드려졌을 때, 전광판에 찍힌 금액은 수수료를 포함해 8,250만 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약 2억 달러. 낙찰자가 호명되자 사람들은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다는 사실에 기립박수를 쳤다.


이 압도적 플렉스의 주인공은 다이쇼와제지(현 닛폰제지)의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였다. 그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낸 그림도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었다. 고흐 특유의 멜랑콜리한 푸른빛과 신경질적인 붓 터치가 극에 달한 이 작품은, 낙찰과 함께 당시 세계 최고 부자의 비밀 금고로 직행했다. 사이토 회장의 수집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이틀 뒤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을 7,810만 달러에 사들이며 양대 경매장을 융단폭격했다.


일본 기업들의 이 돈지랄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1985년의 플라자 합의는 엔화 가치를 단숨에 대기권 밖으로 쏘아 올렸고, 일본 경제는 유례없는 막대한 유동성의 바다를 부유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버블경제’의 화려한 서막이었다. 거리에 넘쳐나는 자본은 주식과 부동산을 집어삼켰고, 도쿄의 야경은 24시간 풀가동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하와이의 최고급 리조트와 뉴욕의 록펠러센터 등이 줄줄이 일본 자본의 쇼핑 카트에 담겼다.


이 끝을 모르고 팽창하던 유동성이 돌고 돌아 도달한 종착지가 미술품 시장이었다. 주식도, 부동산도, 해외 유명 랜드마크도 성에 차지 않게 된 일본인은 마침내 인류가 만든 가장 비싼 그림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1990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이 8,250만 달러에 낙찰되며 당시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왜 고흐였나


그렇다면 왜 하필 고흐였을까? 서양미술사에는 렘브란트 반 레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 파블로 피카소 등 고흐보다 클래스가 높은 화가들도 한 트럭이다. 세계 미술품 수집 시장의 기준으로 보면 더 고급스러운 선택지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버블경제 시대 일본인들이 가장 열광한 것은 의외로 고흐였다. 그들은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한 이 비운의 천재에게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쏟아부었다.


이것이 시대를 잘 만난 벼락부자들의 얄팍한 유행만은 아니었다. 그 연원을 파고들면 20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긴 역사가 존재한다. 일본의 근대 서양미술 수용 과정에서 고흐는 지식인과 대중에게 가장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 시라카바파(白樺派)가 있었다. 1910년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시가 나오야, 아리시마 다케오 등 가쿠슈인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이 결성한 이 문예사조 집단은 서구의 문학과 미술을 일본에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문화운동을 펼쳤다. 그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화가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다. 시라카바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는 고흐의 그림이 뿜어내는 강렬한 생명력과 타협을 모르는 예술적 순수성에 깊이 매료되었다. 여기에 가난과 실패,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생애까지 더해지면서 고흐는 일본 지식인들에게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시라카바파가 주도한 소개와 연구를 통해 고흐 열풍은 미술계를 넘어 근대화를 향해 달려가던 일본 지식인 슬롯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대 일본인들의 고흐 사랑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도 있다. 1920년 시라카바파의 주도로 일본에 처음 들어온 고흐의 원화 가운데는 통칭 '아시야의 해바라기(芦屋のひまわり)'라 불리는 <해바라기 다섯 송이가 있는 꽃병>이 있었다. 간사이의 부호 야마모토 코야타가 소장했던 이 걸작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기 직전, 미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야마모토의 저택이 불타면서 그림 역시 화염 속에서 사라졌다. 오늘날까지도 일본 미술계는 이 사건을 국가적 문화유산을 잃은 비극처럼 기억한다.


전쟁과 함께 사라진 '아시야의 해바라기'는 일본 미술계에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상실감으로 남았다. 2018년 오츠카 국제미술관이 개관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이 작품을 도판화 형태로 복원해 특별 전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행사에 참석한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기념관 관계자와 야마모토 가문의 후손들, 미술계 인사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흐를 정말 사랑하는 일본에서 이 작품이 부활한 의의는 매우 크다.” 한 점의 그림을 되살리는 행사에 이토록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의 특별한 애착을 보여준다.

'아시야의 해바라기'의 기록 사진과 오츠카 국제미술관이 2018년 복원한 도판화 작품. 일본 미술계는 이 그림의 소실을 국가의 문화적 상실로 기억한다.


그 애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일본에서는 고흐를 주제로 한 대형 전시가 끊임없이 열린다. 2017년 도쿄도미술관은 아예 <고흐와 일본>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어 고흐의 일본 동경과 일본인들의 고흐 열광이 서로를 비추는 관계임을 내세웠다. 최근에도 <고흐 임팩트>, <대고흐전> 같은 초대형 기획전이 잇달아 개최되며 수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고흐는 일본에서 '가끔 오는 손님'이 아니다. 한 세기 넘게 꾸준히 사랑받아온 문화적 아이콘이자, 거의 '정기 연재 작가'에 가까운 존재다.


사실 고흐도 일본을 사랑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일본의 고흐 사랑은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흐 역시 생애 내내 일본 문화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화단에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우키요에(浮世繪)가 큰 유행을 일으켰다. 원래는 일본 도자기를 포장하던 종이에 불과했지만, 유럽 화가들의 눈에는 완전히 새로운 예술처럼 보였다. 배우와 미인, 풍경을 담은 이 일본식 목판화는 평면적인 색채와 대담한 구도, 파격적인 시점으로 강한 충격을 주었다. 수많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미술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는 단연 고흐였다.


고흐는 일본 판화를 감상만 하지 않았다. 수집했고, 연구했으며, 아예 유화로 모사하기까지 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거의 그대로 옮겨 그렸고, <탕기 영감의 초상>에는 자신이 수집한 우키요에를 배경 가득 배치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썼다. "나의 모든 작품은 어느 정도 일본 미술에 기초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아를에 정착한 뒤에도 "이곳 풍경은 마치 일본 같다"라며 감탄했다. 고흐에게 일본은 외국 문화를 넘어서 그가 추구하던 예술 세계를 비춰주는 거울에 가까웠다.


이 사실은 일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며 서양을 배우려고 분투하던 중이었다. 그때 서양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가 오히려 일본 예술에 깊이 감화되었다는 사실은 강한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고흐의 강렬한 색채와 독특한 구도에 남은 일본의 흔적은 그 자체로 문화적 인정처럼 받아들여졌다.

고흐의 자포니즘(Japonisme). 일본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연구했을 뿐 아니라 직접 모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고흐 사랑에는 인간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들에게 고흐는 자신들의 예술과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중해준 서양인이었다. 그것은 곧 “일본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도 일본을 사랑했다”라는 쌍방 연애의 서사였다.


여기에 버블경제 시대 일본의 풍경도 덧붙여 볼 만하다. 물론 이것은 역사학자의 정설은 아니다. 다만 한 걸음 물러서서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보면, 고흐의 그림과 버블시대의 일본이 의외로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의 작품은 강렬하다. 노란 해바라기는 금방이라도 불꽃처럼 타오를 듯하고, 밤하늘의 별들은 소용돌이치며 화면 전체를 뒤흔든다. 굵고 거친 붓질,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채, 화면 밖으로 터져 나올 것 같은 생명력이 돋보인다. 그의 그림은 풍경의 묘사를 넘어 감정을 폭발시키는 듯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1980년대 일본도 비슷한 시대를 살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는 날이 머지않았다고 믿었다. 세계 최고의 기업들이 일본에서 탄생했고, 도쿄는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처럼 보였다. 거리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소비는 점점 더 화려해졌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슬롯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 낙관주의는 어딘가 과열되어 있었다. 끝없이 상승하는 자산 가격과 과시적 소비, 세상이 지금처럼 계속될 것이라는 집단적 확신. 그것은 지금 돌아보면 최소한의 현실 감각마저 잃은 광기에 가까웠다.


따라서 1987년과 1990년의 천문학적 낙찰액은 과시욕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 배경에는 한 세기 동안 축적된 문화적 애정과 버블이 만들어낸 시대의 열기가 함께 작용했다. 고흐의 그림은 일본인들에게 그저 유명한 작품이 아니었다. 노란 해바라기와 휘몰아치는 밤하늘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가장 눈부시고 가장 뜨거운 시대를 발견했다.

고흐의 대표작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 타오를 듯한 색채와 폭발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이 그림들에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뜨겁고 낙관적인 시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승전보가 아니라 폐막식이었다


화려했던 버블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훗날 돌아보면 <가셰 박사의 초상>의 낙찰은 승리의 축포가 아니라 폐막을 알리는 불꽃놀이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일본이 세계를 사들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클라이맥스가 펼쳐지던 무렵, 무대 뒤에서는 이미 버블경제의 붕괴가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1990년대 초 일본 경제는 급격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 내내 끝없이 치솟던 부동산과 주식 가격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가 있었다. 결국 일본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며 시장을 진정시키려 하자 거품은 순식간에 꺼졌다.


상승만 거듭하던 자산 가격은 폭락으로 방향을 바꿨다. 도쿄의 부동산 가격은 고점 대비 70% 가까이 하락했고, 주식시장도 붕괴했다. 수많은 기업과 가계가 막대한 부채에 짓눌렸고,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에 빠져들었다. 훗날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게 되는 시대의 시작이었다.


버블경제의 붕괴는 국가만 삼키지 않았다. 역대 최고가로 <가셰 박사의 초상>를 사들였던 사이토 역시 그 파국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가 이끌던 다이쇼와제지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졌고, 경영권 분쟁까지 겹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1996년, 세상을 떠나기 전 사이토는 기괴한 한마디로 전 세계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내가 죽으면 <가셰 박사의 초상>을 나와 함께 화장해 달라."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버블경제의 황제가 몰락해가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았다. 한때 세계 최고가 명화를 전리품처럼 거머쥐었던 인물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것을 지켜낼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결국 <가셰 박사의 초상>은 여러 차례 비밀 거래를 거치며 소유주를 바꾸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정확한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1980년대 일본이 남긴 가장 상징적인 풍경일 것이다. 세계 최고가로 사들인 고흐의 그림은 남았지만, 그 그림을 사들일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욕먹던 돈지랄의 반전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큰 역설이 지금부터 등장한다.


버블경제 시절 일본 기업들이 벌였던 해외 자산 쇼핑과 미술품 수집은 당시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지나친 과시욕이자 무분별한 투자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실제로 버블은 무너졌고, 일본은 긴 침체의 터널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버블 시절 사들인 해외 자산이었기 때문이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해외에 투자해 둔 부동산과 기업 지분, 채권들은 이후에도 꾸준히 배당과 이자를 벌어들였다. 일본은 제조업 경쟁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시기에도 세계 최고 수준의 대외 순자산국 지위를 유지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투자 수익은 장기 불황의 충격을 완화하는 안전판 역할을 했다.


고흐의 그림들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야스다해상화재보험이 <해바라기>를 사들였을 때만 해도 "보험회사가 회장의 취미생활에 주주 돈을 쓴다"라며 엄청난 욕을 먹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도쿄 신주쿠의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며 수많은 관람객을 불러 모았다.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해바라기를 보기 위해 줄을 섰고, 입장료 수입은 꾸준히 쌓여 갔다.


더 놀라운 것은 자산 가치다. 버블이 붕괴한 뒤에 고흐의 작품 가격은 되려 상승했다. 2000년대 초 기업 합병 과정에서 실시된 자산 재평가에서 <해바라기>는 매입가의 두 배가 넘는 가치로 평가되었다. 부동산과 주식이 폭락하던 시대에, 보험회사 로비에 걸린 그림 한 점만큼은 가치가 역주행하고 있었다.


결국 버블 시대 일본인들이 사들인 고흐의 그림은 예상과 다른 역할을 하게 된다. 한때는 과시욕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안정적인 문화 자산이자 우량 투자 자산으로 변모했다. 1980년대의 광기가 남긴 전리품이 1990년대 이후의 불황을 견디는 데 도움을 준 셈이다. 국가 차원에서 “존버는 승리한다”를 입증한 사례다.

2024년 열린 고흐 특별전을 보기 위해 관람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버블경제 시대에 일본으로 들어온 고흐의 작품들은 지금도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것만큼 고흐다운 결말도 없다. 그는 생전에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던 화가였다. 그러나 죽은 뒤 그의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버블경제 시절 일본인들이 사들인 고흐의 그림도 비슷한 경로를 따랐다. 한때는 무모한 사치와 과시욕의 상징처럼 보였지만, 시대가 바뀌자 가장 가치 있는 자산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결국 일본은 고흐를 너무 비싸게 산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너무 일찍 몰락했을 뿐이었다.


고흐를 보러 일본에 가야 하는 이유


고흐와 일본의 인연은 길면서도 복잡하다. 20세기 초 시라카바파의 열광에서 시작해, 버블경제의 천문학적 낙찰 경쟁을 거쳐, 오늘날의 대형 전시회에 이르고 있다. 일본은 그렇게 한 세기 넘게 고흐를 사랑해 왔다. 그 과정에는 동경도 있었고 자부심도 있었으며, 때로는 과열과 광기마저 섞여 있었다.


그래서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의외로 일본이 꽤 흥미로운 여행지가 된다. 보통 고흐를 보려면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이나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먼저 떠올린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도쿄도 좋은 선택이다. 신주쿠의 SOMPO 미술관에는 1987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바로 그 <해바라기>가 걸려 있다.


그 그림 앞에 서면 묘한 기분이 든다. 버블경제는 끝났고, 세계를 사들이겠다던 일본의 욕망도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사이토가 사들였던 <가셰 박사의 초상>은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바라기>는 여전히 같은 나라에 남아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캔버스 위의 노란 꽃들은 138년 전 고흐가 그렸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 바뀐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대다. 버블의 열기 속에서 보았던 해바라기와 잃어버린 30년을 통과한 뒤 바라보는 해바라기는 같은 그림이면서도 전혀 다른 의미를 품는다.


아마 이것이 도쿄에서 고흐를 보는 가장 큰 재미일 것이다. 한 화가의 명작을 감상하는 동시에, 일본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흥망성쇠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성비만 따진다면 고흐를 보러 굳이 유럽까지 갈 필요는 없다. 도쿄 신주쿠에 가면 된다.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던 그 해바라기는 지금도 그 자리에 걸려 있다. 버블경제의 열광과 잃어버린 30년을 모두 지켜본 채로.

도쿄 신주쿠의 SOMPO 미술관. 버블은 사라졌고, 최고가 기록도 깨졌으며, 사람들의 욕망도 바뀌었다. 그러나 고흐의 <해바라기>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당시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는 시티팝 3곡.


아이린 포린(1985), <ミステリー・ガール(Mystery Girl)>


야마시타 타츠로(1980), <Ride on Time>


나카하라 메이코(1983), <ジャグラー(Jug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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