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1988), 『평역 삼국지』
나는 작가치고는 바카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물론 평균적인 성인보다는 많이 읽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독서의 상당수는 재미가 아니라 노동이다. 뭔가를 공부하려고, 확인하려고, 쓰려고 읽는다. 그래서 “무인도에 가져갈 단 하나의 물건은?” 같은 질문에 바카라 제목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나라면 바카라은 안 가져간다. 무인도에는 원고 마감도 없고, 누구에게 교양 있어 보일 필요도 없다. 그러면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미드 풀시즌 박스 세트를 들고 가지(전기만 들어온다면) 왜 바카라을 들고 감?
그런 내가 예외적으로 순수하게 재미로만 읽은 바카라이 있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다. 1988년 처음 나온 이 시리즈는 2020년에 개정 신판으로 재발간되었다. 그 누적 판매량만 무려 2,000만 부가 넘는다. 한국 출판시장에서 2,000만 부는 읽어본 사람보다 안 읽어본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는 숫자다. 위‧촉‧오의 전체 백성보다 독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이 시리즈를 읽었다. 그 나이에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완독했다는 건 독서력이 좋은 게 아니라 생활습관의 오류에 더 가깝다. 정상이라면 운동장에 나가 놀거나 게임을 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 유비의 형주 경영 전략과 제갈량의 북벌 계획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카라이었다. 초등학생을 그런 상태로 만드는 바카라이 정상일 리 없다. 더구나 나는 이미 어린이용 『삼국지』와 다른 판본들을 통해 기본 줄거리를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은 스포일러를 전부 당한 이야기면 재미가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 바카라은 달랐다. 관우가 죽는다는 걸 알고, 촉이 망한다는 것도 알고, 사마씨가 세운 진이 최종 승자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자꾸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중요한 건 결말이 아니라 그 과정”이라는 말을 이 바카라만큼 설득력 있게 증명한 작품도 드물다.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건 어렵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만드는 건 훨씬 어렵다.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는 그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낸 바카라이다.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이 바카라은 분명 위대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떠드는 방식으로 위대한 것은 아니다.
먼저 역사부터 보자. 삼국시대는 220년부터 280년까지 약 60년에 불과하다. 중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진, 한, 당 같은 통일 제국에 비해 짧고 과도기적인 시기다. 실제 중국사에서도 이 시대의 정식 명칭은 '삼국'이 아니라 '위‧진‧남북조'다. 소설에서는 천하를 뒤흔든 거대한 시대지만, 역사바카라에서는 생각보다 빨리 지나가는 에피소드인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후한 제국이 무너진 뒤 새로운 정치 질서가 만들어지고, 귀족과 문벌 슬롯가 형성되며, 불교와 도교를 비롯한 사상과 문화도 크게 변화하던 시기였다. 다만 그 중요성은 유비, 관우, 조조, 제갈량이 벌이는 영웅들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역사 속 삼국시대는 우리가 소설로 기억하는 것보다 더 큰 변화의 일부분이었다.
문학으로서도 비슷하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중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역사와 허구를 결합한 장회소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다만 그 명성이 곧바로 문학적 평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이 읽혔다는 사실과 문학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지』가 포함된 ‘사대기서’라는 분류부터 오해의 소지가 있다. 사대기서는 중국 소설사의 대표작들을 묶어 부르는 명칭이지, 문학성 순위를 매긴 리스트는 아니다. 더구나 시야를 중국문학 전체로 넓히면 『논어』, 『장자』, 『사기』, 당시(唐詩), 송사(宋詞) 같은 위대한 고전들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실제로 문학 연구자들이 중국 최고의 소설을 논할 때는 『홍루몽』이 먼저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 심리와 슬롯를 묘사한 깊이, 서사의 정교함 때문에 중국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삼국지』는 중국문학의 최고봉이라기보다 가장 널리 읽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한 고전의 하나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를 둘러싼 익숙한 찬사들을 별로 믿지 않는다.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논술에 좋다.”, “리더십을 배울 수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다.” 마치 『삼국지』만 읽으면 공부도 잘하고, 경영 능력도 생기고, 인생의 지혜도 얻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솔직히 나는 이런 과장된 설명들이 오히려 『삼국지』의 가치를 가린다고 생각한다. 『삼국지』의 본질은 군벌들이 싸우고, 배신하고, 동맹을 맺고, 다시 싸우는 이야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인간관계와 권력, 전략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는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수효과다.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를 놓아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글쓰기가 늘지는 않는다. 제갈량의 북벌을 여러 번 읽는다고 서울대 합격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아니다. 유비의 창업 서사를 외운다고 갑자기 기업을 경영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2000년대 초 언론에서 “『삼국지』가 논술에 도움이 되는가?”를 취재했을 때도 교육 현장의 반응은 의외로 냉담했다. 논술에 직접 도움이 되는 바카라은 따로 있고, 『삼국지』는 학생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알아서 읽는 바카라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게 차라리 정확한 평가다. 『삼국지』의 본질은 교육이나 자기계발에 있지 않다. 그냥 개쩔게 재미있는 소설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야말로 『삼국지』의 진짜 위대함이라고 생각한다. 교훈이나 필요에 따라 읽는 바카라은 많다. 하지만 순수하게 재미 하나만으로 수천만 명을 붙잡은 바카라은 드물다. 초등학생이 밤새 바카라장을 넘기게 만든 이유도, 수십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반복해서 읽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삼국지』를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인먼트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다. 팝음악으로 치면 비틀즈나 핑크 플로이드보다는 퀸에 가깝다. 퀸은 음악적으로 레전드 밴드들보다 낮은 평가를 받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도 널리 불리고 있다. 결혼식장에서도, 스포츠 경기장에서도, 영화와 광고에서도 끊임없이 재생된다. 『삼국지』도 마찬가지다. 중국 고전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도 유비, 관우, 조조, 제갈량의 이름은 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삼국지』가 재미있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건 원래부터 유명한 고전 아닌가? 왜 하필 이문열 판본이 압도적으로 많이 읽혔을까?
내 생각에 가장 큰 이유는 문체다. 솔직히 나는 이문열을 좋아하는 작가로 꼽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 세계를 논할 만큼 많이 읽지도 않았다. 이문열이라는 이름만 보고 바카라을 집어 든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평역 삼국지』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문열은 『삼국지』를 그저 잘 옮긴 사람이 아니다. 다른 판본들이 『삼국지』를 전달한다면, 이문열은 『삼국지』를 공연한다. 이건 번역보다는 무대 장악에 가깝다. 일례로 바카라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바로 이런 문장이 나온다.
티끌 자옥한 이 땅 일을 한바탕 긴 봄꿈이라 이를 수 있다면, 그 한바탕 꿈을 꾸미고 보태 이야기함 또한 부질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같은 냇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고, 대의 흐름은 다만 나아갈 뿐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새삼 지나간 날 스러진 삶을 돌이켜 길게 적어 나감도, 마찬가지로 헛되이 값진 종이를 버려 남의 눈만 어지럽히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요즘 소설이었다면 편집자가 뜯어말렸을지도 모른다. “독자들이 어려워합니다.”, “첫 문장은 짧고 강하게 가시죠.” 같은 피드백이 날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지』는 다르다. 이것은 애초에 작은 목소리로 읽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황제가 있고, 천명이 내려오고, 충신과 간신이 섞이고, 수십만 대군이 움직인다. 영웅들은 천하를 놓고 다투고, 나라는 흥하고 망한다. 이런 이야기에는 어느 정도 과장된 목소리가 필요하다. 너무 담백하면 오히려 맛이 죽는다. 조조의 백만대군이 출병하는데 문장이 감성 에세이처럼 나긋나긋하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 이문열은 현대 소설가처럼 속삭이지 않는다. 마치 수백 명의 관객 앞에 선 이야기꾼이 북을 한 번 울리고 목청을 가다듬은 뒤, “자, 이제 천하가 셋으로 갈라지던 때의 이야기다” 하고 판을 여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독자에게 이런 노래를 들려준다.
굽이쳐 동으로 흐르는 긴 강물
그 물결에 일리듯 옛 영웅 모두 사라졌네.
옳고 그름 이기고 짐 모두 헛되어라.
푸른 산은 예와 다름없건만
붉은 해 지기 몇 번이던가.
이 몇 줄에는 『삼국지』의 세계관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영웅은 등장하지만 결국 사라진다. 천하를 놓고 벌어진 승부도 세월이 흐르면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삼국지』는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는지를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인간들이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문열 문체의 강점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는 『삼국지』를 굳이 현대적으로 맞추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전 번역문처럼 뻣뻣하게 다루지도 않는다. 한자어가 많은 문장, 길게 밀고 나가는 호흡, 대의명분과 흥망성쇠를 말할 때 높아지는 어조. 다른 작품이었다면 과했을 요소들이 이 바카라에서는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삼국지』는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일상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황제, 천자, 충의, 군신, 의형제, 패업 같은 말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의 언어가 아니다. 잘못 쓰면 박물관 유리장 안에 들어간 유물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바꾸면 『삼국지』 특유의 장중함이 사라진다.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들고 나오는데 문장이 카톡 채팅 같으면 곤란하지 않은가.
다른 판본들과 비교하면 이 특징이 더 뚜렷해진다. 예컨대 황석영 판본은 원전에 충실한 정역(正譯)을 지향한다. 문장도 담백하고, 원문의 흐름을 크게 흔들지 않으려는 태도가 강하다. 그래서 『삼국지연의』를 가능한 한 온전하게 만나고 싶은 독자에게는 분명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이문열 판본은 방향이 좀 다르다. 그는 『삼국지』를 원문에 가까이 가져가기보다, 한국어 독자가 가장 극적으로 읽을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무대에 올린다. 인물의 등장에는 조명을 켜고, 전투에는 북소리를 깔고, 흥망성쇠를 말할 때는 볼륨을 높인다. 그 결과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는 한국어로 다시 쓴 대하 서사에 가깝게 읽힌다.
물론 이것은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일 수 있다. 원전을 더 정확히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문열의 개입이 지나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반대로 이야기의 박력과 흡입력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바로 그 개입이 결정적인 매력이 된다. 번역의 정확성과 독서의 쾌감은 악보와 연주의 차이와 비슷하다. 악보를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했는가와 청중을 얼마나 몰입하게 만들었는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적어도 재미라는 기준에서 보면 『삼국지』라는 원전은 유난히 이문열의 스타일과 잘 맞는다. 군신의 의리, 천하의 명분, 영웅의 몰락, 패업의 허무함을 말할 때 이문열의 문장은 신기할 정도로 핏이 딱 떨어진다. 이건 마치 퀸의 노래를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뛰어나도 다른 가수가 부르면 그 맛이 안 산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정수는 문체만이 아니다. 그보다 제목 앞에 붙은 두 글자가 더 핵심이다. ‘평역(評譯)’. 번역이 아니라 평역이다. 번역자는 원문을 옮긴다. 평역자는 원문에 해설을 덧붙인다. 얼핏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독서 경험은 확 달라진다.
사실 고전은 이런 방식이 잘 어울린다. 시대와 문화가 너무 달라서 원문만 옮겨서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평역자는 번역을 넘어 안내자 역할도 한다.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배경을 설명하고, 인물과 사건의 의미를 풀어준다.
문제는 이문열이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간다는 점이다. 보통의 평역이 설명만 추가한다면, 이문열은 아예 독자의 해석에 개입한다. 인물을 재평가하고, 사건의 의미를 새로 읽고, 때로는 원작이 만들어 놓은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이 바카라이 오래전부터 "평역이라기보다 편역에 가깝다"는 비판을 받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 개입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조조다. 전통적인 『삼국지』에서 조조는 사실상 최종 보스다. 유비가 충성과 정의를 상징한다면 조조는 권모술수와 야망의 화신이다.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유비를 응원하고 조조가 참교육 당하길 바라며 바카라을 읽는다.
그런데 이문열은 이 오랜 독서 습관에 겐세이를 놓는다.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이미 무너져 가는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던 유비 vs 낡은 체제를 리셋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 했던 조조 - 과연 역사는 누구를 더 높이 평가해야 하는가?”
실제로 『평역 삼국지』에서 조조는 난세의 간웅이라기보다,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든 유능한 정치가에 가깝게 그려진다. 지금이야 이런 해석이 낯설지 않다. 하지만 내가 처음 『평역 삼국지』를 읽던 시절에는 꽤 파격적이었다.
어린 나에게 유비는 『삼국지』 불멸의 주인공이었다.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을 할 때도 늘 유비를 골랐다. 제일 먼저 제갈량을 찾아 삼고초려를 하고, 그가 제시한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세력을 키워 나가곤 했다. 이 과정에서 조조는 반드시 넘어야 할 마지막 벽이었다.
그래서 이문열의 조조론은 동심 파괴 수준으로 충격적이었다. 역사 속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꼭 선악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처음 생각해본 순간이었달까. 명분을 지킨 사람과 세상을 바꾼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중요한지, 나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삼국지』의 선악 구도가 통째로 흔들렸다.
다만 이건 이문열의 독창적인 해석이 아니다. 원조는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학가인 곽말약(郭沫若)이다. 중요한 것은 곽말약이 조조를 좋아했느냐가 아니다.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랐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촉한정통론이 "누가 정통성을 계승했는가?"를 묻는다면, 곽말약은 "누가 실제로 슬롯의 진보를 이끌었는가?"를 물었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깔려 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곽말약은 역사를 왕조의 계보가 아니라 슬롯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후한의 간판을 지키려 한 유비보다, 군웅할거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 조조가 더 중요한 인물로 보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조조가 현대적 의미의 진보주의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철저히 권력자였고 군벌이었다. 다만 곽말약이 주목한 것은 그의 역사적 기능이었다. 끝없는 전쟁과 기근 속에서 백성들이 다시 농사를 짓고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만들었는가가 그에게는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훗날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이 질문에 다시 맞닥뜨렸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 교과서에서 말하는 슬롯 변혁과 역사의 발전 같은 교리를 진지하게 믿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다시 읽은 『평역 삼국지』에서 이문열-곽말약의 조조론은 이전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이미 무너져 가는 체제의 수호보다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꽤 아이러니한 경험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작가가 소개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 운동권 대학생이 설득당하고 있었던 셈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는 한 번 더 꼬인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였던 곽말약은 정통성보다 역사적 성과를 중시하며 조조를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문열 역시 비슷한 이유로 조조에게 매력을 느낀 듯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도 든다. 보수주의자가 왜 하필 마르크스주의자의 해석을 가져오지? 오히려 유비의 정통성이 더 보수의 가치에 어울리지 않나?
내 생각으로는 이문열이 조조에게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박정희를 본 것이 아닐까 한다. 정통성에는 흠결이 있지만 뛰어난 국가 운영 능력을 보여준 지도자. 명분보다 성과를 앞세웠고, 혼란한 시대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인물. 조조와 박정희 사이에는 역사적인 유사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이문열은 박정희가 이룬 산업화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물론 둘을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 다만 이문열이 왜 그토록 조조를 매력적인 인물로 그렸는지 설명하는 하나의 단서는 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복권한 조조를 한국의 보수주의 작가가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다시 박정희를 연상하게 만든다. 중국 혁명사와 한국 현대사가 『삼국지』라는 소설 속에서 묘하게 교차하는 셈이다.
결국 『평역 삼국지』가 던지는 질문은 상당히 정치적이면서도 현실성이 있다. “정통성을 지킨 사람이 더 위대한가, 아니면 세상을 실제로 바꾼 사람이 더 위대한가?” 유비와 조조를 둘러싼 이 논쟁은 고대 중국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도 지금 시대에 같은 질문을 놓고 끊임없이 논쟁하고 있다.
제갈량 사후의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는 점도 『평역 삼국지』를 재미있게 읽은 이유다. 어릴 때 처음 읽었던 정비석 판본을 떠올려보면, 『삼국지』는 사실상 오장원에서 끝나는 이야기였다. 물론 뒤 내용도 있긴 하다. 하지만 서술의 톤은 제갈량이 죽는 순간 정점을 찍고 확 내려간다. 그것은 주인공이 퇴장한 뒤의 에필로그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는 『삼국지』도 그렇다. 도원결의, 황건적 토벌, 삼영전여포, 삼고초려, 장판파, 적벽대전, 화용도, 출사표, 북벌, 오장원. 명장면은 거의 모두 여기에 몰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제갈량의 죽음을 『삼국지』의 결말처럼 기억한다.
그런데 이문열은 거기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이게 오히려 역사에 더 가까운 태도다. 역사는 영웅이 죽는 순간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은 모두 죽었다. 조조의 가문도 다르지 않았다. 반면 국가와 체제는 남았다. 역사는 영웅 개인보다 그 이후를 더 오래 살아간다.
그래서 제갈량 사후의 이야기는 의외로 『삼국지』의 핵심이다. 전반부가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체제의 이야기다. 관우의 무공이나 제갈량의 지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인재를 어떻게 길렀는가, 권력을 어떻게 승계했는가, 조직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운영했는가 같은 문제들이다.
그 결과는 냉혹하다. 충의와 명분의 상징이었던 촉은 인재가 고갈되며 무너진다. 손권이 세운 오는 내부 분열과 부패 속에서 쇠락한다. 그렇다고 조조의 위가 승리한 것도 아니다. 위 역시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게 권력을 빼앗긴다. 결국 유비도, 손권도, 조조도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마지막에 판을 가져가는 것은 처음부터 주인공도 아니었던 사마씨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결말이 앞에서 살펴본 조조론과도 이어진다는 점이다. 『평역 삼국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정통성이 중요한가, 아니면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이 중요한가?” 조조를 재평가하는 이유도 그 질문 때문이고, 사마씨의 승리를 끝까지 보여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유비와 제갈량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천하는 그들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문열은 그 불편한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역 삼국지』의 후반부는 후일담이 아니다. 오히려 이 바카라의 역사관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영웅이 아니라 체제가 역사를 움직인다는 관점을 끝까지 관철한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영웅들은 퇴장해도 역사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역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사람들은 유비와 제갈량을 기억하지만, 끝내 천하를 통일한 것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평역 삼국지』가 소설을 넘어 역사로 거듭나는 지점도 여기다.
결국 이 바카라의 진짜 주인공은 유비도, 조조도, 제갈량도 아니다. ‘이문열’이다. 『평역 삼국지』는 이문열이라는 작가가 원작 『삼국지』를 자기식으로 다시 해석하고 재조립한 작품에 가깝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로 『삼국지』를 공연했고, 조조를 재평가하며 독자의 상식을 흔들었고, 제갈량의 죽음 이후까지 밀고 나가며 영웅담을 역사로 확장했다.
물론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원전에 대한 개입이 지나치다는 비판도 꾸준히 받아왔다. 하지만 적어도 재미라는 기준에서만큼은 나는 그 비판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재미는 원래 불공평하다. 정확성처럼 측정할 수도 없고, 객관성처럼 비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설명하기 어렵다. 어떤 바카라이 재미있는지는 결국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결말을 다 알면서도 다시 펼치고, 등장인물의 운명을 외울 정도가 되었는데도 또 읽는다. 내게는 『평역 삼국지』가 그런 바카라이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바카라을 읽느라 밤까지 새운 기억은 별로 없다. 원고 마감이나 시험 공부 때문에 그런 적은 많다. 그런데 순수하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밤샌 기억은 대부분 『평역 삼국지』와 관련되어 있다. 새벽 3시에 "아오 딱 한 챕터만 더 읽고 자야지" 하다가 다음 날 1교시에 결국 졸게 만든 무시무시한 바카라이었다.
그래서 인생의 바카라 시리즈에서 '재미'라는 항목을 만든다면, 나는 별 고민 없이 이 바카라을 맨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재미로는, 정말 아무도 못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