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리뷰, 바카라요약]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byWOODYK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바카라은 개인적으로 많이 끌리는 면이 있다. "살아가는 것이 배우는 과정이고 살아가는 것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다 보니 언제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들에 대한 글들은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이 있다.


대학 시절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을 읽으면서도 그랬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을 때도 그랬으며, 이번에 다시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도 그렇다. 삶이란 무엇인지를 알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의미인가를 질문하고,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본인이 성장하고 성찰하며 자아를 찾는 내용들을 읽을 때면 뾰족한 하나의 돌기가 몸속에서 올라오는 느낌이 든다.


성장은 고통이 따른다. 자아를 알아가는 과정은 지난하고 힘든 시간이다. 늘 유혹은 존재하고 유혹의 그늘 속에서 자아가 흔들리게 된다. 악과 선이 존재하는 듯해도 어떤 것이 악이고 선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자아가 흔들리기에 세상도 흔들리고 혼돈스럽게 보인다.


싯다르타는 부처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라는 제목을 통해 싯다르타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상징들을 제목 하나로 형상화한 듯하다. 불교의 철학을 찾아가는 여정 속에서 열반에 이르는 부처의 모습을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으나, 이 바카라은 부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바카라의 내용은 삶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그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며 세상의 여러 모습들을 보며 배우고 느끼고 깨닫는 이야기이다.


결국 자신이 힘든 여정을 떠난 이유조차도 흔들리고 세속의 모습을 보며 즐기기도 하며, 그러다 범인처럼 보이는 나루터 뱃사공의 모습을 보며 강의 철학을 배우고 드디어 진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바카라 속에서 진리라는 말을 하지는 않지만 개인적 생각으로는 세상은 양면을 갖고 있지만 그 양면은 하나다라는 의미이지 않을까 한다.


"싯다르타는 귀를 기울였다. 그는 이제 온통 귀 기울여 듣는 자가 되어, 온통 듣는 데 몰두하였으며, 마음을 온통 비운 채, 온통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는 귀 기울여 듣는 법을 끝까지 다 배웠음을 느꼈다. 진작부터 그는 자주 이 모든 소리들을, 그러니까 강물 속에 들어 있는 이 수많은 소리들을 들어 왔었지만, 오늘은 그 소리의 울림이 새로웠다.


그는 더 이상 그 수많은 소리들을 서로 구분할 수가 없었으니, 기쁜 소리를 슬픈 소리와 구분할 수도, 어린애 소리를 어른 소리와 구분할 수도 없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싯다르타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어떤 특정한 소리에 묶어 두거나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몰입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진리의 역도 진리이다라는 것처럼 서로가 다른 면을 갖고 있는 듯하지만 그 두 개는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과, 수도자가 찾아가는 이상적 진리와 철학은 세속에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만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사찰을 방문하다 보면 불이문이 있다. 서로가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이라는 뜻으로, 두 개가 아니라는 의미의 不二(불이) 문이다. 불교의 진리에서 서로가 달라 보일지라도 그것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고 다르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싯다르타는 브라만의 최고 계급을 갖고 있는 사람이지만 삶과 자아를 찾아 어려운 고행길을 친구와 떠난다. 여정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들을 다듬어가고, 신망받는 고승의 생각들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그 언어에 빠져 갇힌 철학들을 거부하기도 한다.


고승의 언어에 갇히게 되면 자신은 사라지고 그 언어가 그 사람이 되기에, 자신은 그것조차도 거부하며 길을 떠난다. 여정 중 허무하고 허탈한 마음들이 세속의 여인에게서 치유되고 스스로 장사를 통해 돈도 벌지만, 자신이 갖고 있던 마음속 허전함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여정을 떠나 강의 철학을 읊고 있는 늙은 뱃사공을 만나 같이 기거한다.


그 속에서 뱃사공이 보여주는 언어의 굴레가 아닌 행동과 침묵으로써 철학을 배우고, 강이 전달하는 삶의 흐름과 꾸준함, 그리고 윤회를 배우게 된다. 자신이 지금까지 세속에 지었던 죄를 스스로가 받게 되고 그 죄의 고통에서 한동안 힘들어하지만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세상이란 곳에 서 있는 자신이 흔들림 없이 세상의 이치들을 다른 모습이지만 하나의 모습으로도 이해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삶의 평온을 찾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의 눈에는 친구 싯다르타의 얼굴이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다른 얼굴들이 보였다. 수많은 얼굴들이 기다랗게 한 줄로 서서 나타났는데, 수백 개의 얼굴들이, 수천 개의 얼굴들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왔다가는 다시 흘러가 버렸다.


그렇지만 그 모든 얼굴들이 동시에 거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얼굴들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어 새로운 모습의 얼굴로 변하였다. 그렇지만 그 얼굴들은 모두가 싯다르타의 얼굴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싯다르타』 그리고 한국 소설의 대가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을 읽다 보면, 인간은 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 있으며 삶의 의미를 되뇌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삶의 의미는 누구의 말보다 자신이 느끼고 겪으며 얻은 지혜에서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