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랫동안 "세상은 마음이 만든 환상이다"라는 달콤한 해석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동서양의 수많은 종교와 고전 철학, 그리고 현대의 자기 계발 서적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눈앞의 현실은 영혼을 가두는 동굴 속 그림자이며, 가짜 세상이고, 낮에 꾸는 꿈이며, 홀로그램 영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동굴 밖으로 직접 걸어나가기 보다 동굴 안에서 내면의 생각을 먼저 변화시키면 외부 세계는 자연스럽게 따라서 바뀔 것이라는 메시지는 거부하기 힘들 만큼 매혹적이다. 그러나 내면의 마인드셋만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현실의 거친 파도와 부조리를 단지 내 마음이 불러온 환영이라 치부하며 무시하는 순간, 인간은 진흙탕 같은 삶의 현장에서 발을 떼고 관념의 세계로 도피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상의 역사에는 이러한 영적 도피에 냉혹한 경종을 울리고, 철저하게 현실 그 자체를 직시하라고 요구한 현실주의자들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인간 본성과 권력의 냉혹한 실상을 깨부순 이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다. 그는 <군주론>에서 허황된 당위와 당위적 윤리에 빠져 실재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유약함을 엄중히 경고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빠져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놓치는 자는 자신을 보존하기보다 파멸을 보게 될 것이다." 마키아벨리에게 세상은 마음으로 조율하는 따뜻한 공간이 아니었다. 타협 없는 욕망과 권력의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판이었으며,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앞의 실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직접 개입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삶을 가득 채운 고통과 불확실성을 꿈이라며 회피하려는 시도에 대해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역시 서늘한 경고를 건넨다. 삶의 비극성을 내 마음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가벼운 태도에 대해 그는 실재하는 삶의 고통을 직면할 것을 주문했다. "인간 삶의 구체적 실재는 끊임없는 투쟁이자 결핍이며, 고통이다. 현실을 무시한 채 얻어지는 평화는 환상에 불과하다." 그에게 현실의 고통은 마음을 비운다고 사라지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루하루 겪어내야 하는 생생한 실재였다. 따라서 현실의 거친 면모를 인정하는 것만이 비로소 진짜 삶을 살아내는 출발점이 된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니체에 이르러, 현실주의 철학은 단순한 직시를 넘어 ‘지상으로의 열정적인 개입’으로 승화된다. 니체는 눈앞의 세상을 가짜라 폄하하고 저 너머의 유토피아나 내면의 영성만을 숭상하는 이들을 향해 지상을 비하하는 자들이라 칭하며 분노했다. 그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형제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봉헌하노니, 지상에 충실하라! 하늘에 대한 헛된 희망을 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 니체에게 진짜 삶의 의미는 매끄러운 관념의 세계에 있지 않았다. 피와 땀이 튀고, 피할 수 없는 모순과 위험이 출렁이는 지상의 무대에 직접 뛰어드는 것. 나의 운명을 긍정하고(Amor Fati), 부딪히며, 나만의 삶을 조각해 나가는 개입의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완성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내면을 정돈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시각을 바꾸는 것은 의미가 있다. 내면의 통찰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그려주는 설계도가 되어준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설계도가 수천 장 쌓여 있어도, 실제로 진흙을 묻히며 벽돌을 쌓는 행동이 없다면 집은 결코 지어지지 않는다. 마음만 바꾸고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것은 무력한 태도이며, 행동 없는 관념은 한낱 공상이 될 수 있다. 동굴 속 그림자를 가짜라 부르며 눈을 감고 있기보다, 그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차가운 현실의 벽을 손으로 터치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을 깊게 바라보는 통찰을 가슴에 품되, 두 발은 철저히 진흙탕 같은 현실의 땅에 굳건히 뿌리박는 것이 필요하다. 관념의 세계를 나와 오늘도 눈앞의 현실에 과감히 개입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진짜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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