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J의 학창 시절 친구 중 가장 가까운 이다. 하지만 그가 왔다 하면 J가 꼭 외박하고 말아(J는 술에 취하면 차에 탄 채로 수 시간을 잠들어버린다) 사실 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인물이었다. 게다가 신혼 초부터 꾸준히 술 이슈로 힘들었던 터라 막상막하로 술 무용담을 가진 친구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우리의 여유 없는 시간 사정 때문에 그는 보통 가게에 손님으로 등장했고 그럴 때면 나도 대면하게 됐는데 볼 때마다 꾸준히 함께 술 한잔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쳐왔다. 나는 고망이 핑계를 대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속으로는 "나는 별로!"라고 외쳤다.
하지만 얼마 전 그가 부인, 친구랑 방문했을 때는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며 다음번에 휴일이 조정되면 술자리를 가지자고 답했다. 다시 보니 다소 익살스러운 구석이 있는 그가 재미있는 캐릭터로 생각되었고 늘 함께하는 부인과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심지어 그날은 곧장 고망이를 보러 집으로 향하지 않고 2차로 간 노래주점에도 얼마간 더 머물며 그들과 함께했다. 소맥도 2잔이나 마시고 노래도 2곡이나 불렀다. 모두 기꺼이 한 일이다. 왜 심경의 변화를 보였을까. 이것도 내 감정이 한 일이라 머리로 이제 분석해보고 있다.
그런 유흥을 통 즐기지 못하는 삶이라 그랬던 것도 물론 있겠다. 그리고 이마의 주름살만큼 J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져서인 이유도 크겠지.
수년을 소원했다가 다시 만난 사이지만 J의 H에 대한 감정은 좀 특별한 데가 있었다. H도 마찬가지인 듯했고. 다시 만난 후 H는 정기적으로 우리 가게를 방문하는 중이고 J는 H의 결혼식에 자기네들의 추억이 담긴 숫자로 축의금을 보냈다. 나는 J가 누군가의 결혼식을 신경 쓰는 모습은 처음 봤다!
이것도 남자 종특이라 할 수 있을까? 속 마음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유추해야 하는 것. "정말 소중한 친구야"라는 말 같은 건 죽어도 못한다. 그저 큰돈을 축의금으로 보내고 "그렇게나?"라고 묻는 나에게 "그럴 만하니까."라고 말하는 게 다다.
만나면 맨날 반복되는 추억이야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가능한 최선을 다해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래서 이제야 파악했다. 꽤나 깊은 우정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를 쉽게, J를 외박으로 이끄는 술꾼 정도로 폄하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J에게 몇 안되는 중요한 친구라고 생각하니 그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육아도 어차피 미지의 인간을 이해해가는 과정이라 잘 알겠다 싶다가도 도저히 이해불가인 남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왕왕 화가 났던 술자리는 친하지도,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고 득이 되지도 않는 인물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게다가 다음 날이면 "쓸데없이 간을 내주었네"하고 스스로 후회 섞인 고백을 할 때가 많아 분통이 터졌다. 그러면 곧잘, 사랑하는 사람이 싫다는 행동은 안 하는 게 그게 사랑 아닌가? 이 인간이 나를 사랑하는 거 맞나? 하는 답도 없는 사랑 의심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런데 낯설거나 친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쉽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고망이를 보면서 알게 된 바가 있다. 말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는 고망이에게 "말해봐, 그 정돈할 수 있잖아"라고 하는 건 아무리 완곡하게 하는 이야기라도 압박이 된다는 것이다. 되려 고망이를 숨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힘든 것도 기질이고 고유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내향성을 외향성으로 만들 수 없다. 기질은 인정해줘야지 바꿔놓으려 해선 안된다. 슬롯적 경험을 쌓아가면서 그 기질을 보완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기면 어려운 상황들은 점차 줄어든다. 그러니 고망이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못할 수 있어. 괜찮아." "그래도 다가가려고 한 것도 대단한 거야."라고 다소 슬롯생활에 불편할 수 있는, 그 어찌할 수 없는 기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불안하지 않게 해줘야 하는 거다.
그런 눈으로 보니, J는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약해지고 거절하면 마음이 되려 불편해지는 그런 사람. 그러니 나는 말하자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리려고 그 애를 쓴 것이다. 이제는 왜 거절 못하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무리하지 않게 마시라고 하고는 무사귀환을 빌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나이들어 체력이 떨어지니 저도 예전만큼 많이 마시지 않고 돌아오고 나도 걱정이 길게 이어지기 전에 잠들어 버린다. 이렇게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