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결혼 10주년을 맞아 여름 바캉스 겸 기념 여행을 계획해보는 중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도 그렇고 특별 여행지라면 역시 몰디브나 하와이의 호화 리조트가 번뜩 떠오른다. 하와이는 오~랫동안 이야기만 들어온 꿈의 여행지기도 하다. 그런데 J는 호락호락하게 응해주지 않았다.
"이코노미 타야 되는데 폐소공포증 와서 안돼. 그리고 고망이도 그렇게 긴 비행을 어떻게 견뎌?"
폐소공포증은 확인된 바 없으나 이코노미의 옴짝달싹 못하는 좌석에서 10시간 넘게 묶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도 숨이 막히긴 했다. 10년 전에는 거뜬했는데, 시간은 순식간인데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리마인드 웨딩으로 홋카이도나 가자."
일본 이외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검은 속내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명분에도 수긍했다. 인천에서 치토세 공항까지는 3시간이 채 안 되고 위도 상으로 러시아에 가까운 위치라 여름에 시원하다는 점도 끌렸다. 고망이 갖기 직전 겨울에 떠났던 홋카이도 여행도 아스라이 떠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한참을 뜸 들이다 결정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한 것이다.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여행 이미지를 찾아보는데 아직 별로 흥이 안 난다. 하와이가 아니라서? 왜 그런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솔직히, 이제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는 것이 그리 신나지 않는다. 여행 갈 궁리로 바빴던 20대의 내가 알았더라면 '이 언니 실망스럽게 왜 이러냐'고 그럴 것 같다.
일상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자유롭다'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주는 것이 여행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상황 때문일까? 거기를 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컨디션이 급변하는 어린이와 두 배 이상 많아지는 짐, 총기를 잃은 공간지각력과 언어력, 순발력은 어깨를 무겁게 한다. 여행지라는 낯선 공간이 주는 신선함과 설렘, 모험적 상황을 맞닥뜨리며 도파민 터졌던 그 감정들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곧잘 막막한 행군 같다.
지난번 도쿄 여행에서 폭망 했던 첫날, 계획했던 관광 포인트를 거푸 퇴짜 맞으며 돌아선 차 안에는 깊은 침묵이 이어졌고 우리의 마음은 이런 생각으로 하나가 되었다. '돈 주고 하는 생고생.' 하지만 누구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는 즉시 그것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육아의 과정이 버라이어티한 면이 있어선지 가까스로 잡힌 루틴이 너무 소중하고 그래서 그것이 깨어지는 것이 싫다. 그래선지 여행은 한편으로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 왜 여행 계획을 잡는 거야? 그러게. 안 간다고 뭐라 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그런데 안 가면 또 아쉬운 게 여행 아닌가 싶다.
그 행군 같은 여행, 짧디 짧은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잠시 웃고 깜짝 놀랄 정도로 기쁜 순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전망대로 유명한 스카이트리까지 가서 시티뷰는 보지 못했지만 아케이드에서 예쁜 물고기들을 구경하고 햄스터의 귀여움에 반했던 일, 인기 있는 스키야키집에서 식사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우연히 찾아 들어간 평범한 고깃집에서 모두 즐겁게 배불리 고기를 먹었던 일, 도요스 시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스시를 먹고 고망이 역시 스시 첫 입을 경험한 일. 낯선 주차 정산 기기 앞에서 쩔쩔맬 때 끝까지 옆에서 기다리며 도와준 어느 신사분의 배려.
그런 예상치 못한 소소하면서도 인상 깊은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여행으로 이끈다. 예정된 멋지고 즐거운 일들이 아니라 불쑥 다가오는 낯설고 다정한 경험들. 그것이 나에게 크고 작은 교훈도 주고 용기도 주는 것 같다. 첫날은 폭망해도 다음 날은 꽤 잘 풀리는 것처럼 니 인생도 완전 망할리는 없다고. 그렇게 믿어도 된다고 배포 10점쯤 올려주는 것 같다.